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수학과 물리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책을 통해 패러데이나 드브로이 같은 과학자의 이론을 이해하고, 맥스웰이나 아인슈타인처럼 유명한 과학자와 사귀는 걸 좋아했다. 당시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어 관심을 끌자, 발레리는 아인슈타인을 만난 자리에서 불쑥 물었다.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면 공책에 적어 둡니까?”
아인슈타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뇨.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답니다.”
발레리는 영감을 얻어 독창적인 사유에 이르는 경위를 ‘번갯불의 섬광’이라고 표현했다. 천재는 번갯불의 섬광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아이디어를 재빠르게 포착하는, 비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고실험(思考實驗)은 실험에 필요한 장치와 조건을 가정한 뒤 일어날 현상을 예측하는 머릿속의 실험이다. 사고실험을 통해 갈릴레이는 관성의 개념을 발견했고, 톰슨은 원자 모형을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은 ‘번갯불의 섬광’처럼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고실험을 통해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국정기조의 핵심 단어로 내세우면서 미래창조과학부와 관련 기관의 조직 명칭에 새로운 접두사들이 추가됐다. 창조경제, 창의산업, 창의문화, 미래창의, 창의인재, 융합인재, 융합기획 등등 비슷비슷한 접두사로 이름만 바꾼 조직이 여기저기서 탄생했다. ‘창조경제’나 ‘무한상상’ 같은 접두사를 앞세운 행사나 사업이나 모임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갑자기 ‘창조의 제국’이 된 듯하다. 그런데 창조, 창의, 상상 같은 단어를 앞세워 아이디어를 개구리 알처럼 마구마구 낳아도 되는 걸까?
‘빛나는 아이디어들의 실패율은 개구리 알의 폐사율만큼이나 높다.’ 세계적인 석학인 피터 드러커는 ‘빛나는 아이디어 가운데 열에 아홉은 분명 말잔치에 지나지 않고, 남은 것들도 대다수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연못마다 개구리 알이 넘쳐나듯이 아이디어도 부족한 법이 없다.’
개구리 알처럼 많은 아이디어를 낳아서 번갯불의 섬광처럼 포착하는 능력이 필요한 걸까? 명저 ‘단절의 시대’에서 드러커는 잘라 말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것과 달리 창의력이 아니다. 혁신적인 자세가 중요하다. 그것은 고도로 조직되어 있고, 규율이 잡혀 있으며, 체계적인 프로세스다.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창조는 4단계로 진행된다. ①Data+System=Information; 데이터를 가공하여 가치 있는 정보(Information)를 만든다. ②Information+Experience=Knowledge; 정보에 경험을 더해 지식(Knowledge)을 쌓는다. ③Knowledge+Intuition=Wisdom; 지식에 직관(융합)을 담아 지혜(Wisdom)를 터득한다. ④Wisdom+Imagination=Creation; 지혜에 상상의 나래를 달아 창조(Creation)를 일으킨다. 묘하게도 이 순서는 역대 정부의 국정기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창조경제의 공식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스템과 경험과 직관과 상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냥 상상만 부풀린다고 창조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