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 홍인기 교수의 표현이다. 즉 ‘법을 만들고, 돈을 주고, 사람을 뽑아서 일을 시킬 수 있어야’ 뭔가를 해볼 수 있다는 얘기다. 어떤 법을 만들고, 누구를 뽑아서 어디에 돈을 쓸지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공약이니 정책이니 하는 것이 다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요새 가장 뜨는 용어는 뭐니 뭐니 해도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이다. 유행은 패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책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패스트패션’까지는 아니지만 ‘패스트정책’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다. 그리고 유행하는 정책과 단어에 있어서만큼은 이효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트렌드세터’들이 바로 공무원들이다.
지난 정부 때 ‘녹색성장’을 기치로 내걸었던 기관들은 이제 ‘창조경제’의 화신이 되어 가고 있다. 기존 정책의 목표도 제대로 실현된 게 없는데, 정책 목표는 정부나 윗사람이 바뀔 때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을 거듭한다. 그러니 5년마다 변신을 거듭해야 하는 공무원들의 특기가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나 용어를 기존 정책에 집어넣어 문서를 바꾸는 일종의 ‘판갈이’인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도 일종의 경쟁이라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문화융성 시대…’ 등의 문구를 토론회 주제에 넣는 기관은 애교 수준이다. 부서 이름을 창조교통융합으로 개편한 기관도 있으니, 그야말로 적응력 하나만큼은 창조경제의 첨병이라 할 만하다.
3대 국정과제에 ‘문화융성’이 포함되고, ‘문화재정 2%’가 목표치로 제시되는 한편 대통령 소속의 문화융성위원회도 꾸려졌다고 한다. 문화계 종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인데도 슬며시 걱정부터 되는 건 왜일까. 지난 정부 시절 ‘엘 시스테마’(마약과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베네수엘라의 오케스트라 교육 시스템)의 성공 사례가 회자되면서 한국에서 벌어진 한 편의 코미디 같은 기억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엘 시스테마’를 다룬 영화가 개봉되고 각종 프로그램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자 청와대, 당시 교육인적자원부·문화관광체육부, 지방정부 등 온갖 곳에서 ‘한국형 엘 시스테마’를 외쳐 댔다. 그놈의 ‘엘 시스테마’가 뭐길래 이 난리인지 곱슬머리가 매력적인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마저 미워질 지경이었다. 당시 전국의 ‘문화’자 붙은 기관들은 오케스트라 사업 계획을 시행하거나 검토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 덕에 지난 5년간 전국에 생긴 오케스트라만 200개가 넘는단다. 지금 그 오케스트라 중에 몇 개나 남아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사실 이런 정책은 한두 개가 아니다.
‘쪽지 예산’과 ‘프로젝트성 예산’으로 집행되는 정책일수록 유행에 민감하다. 일단 유행한다 싶은 아이템은 끼워 넣고 보는 식이다. 공공미술, 커뮤니티 아트, 재래시장 살리기, 간판 바꾸기, 사회적기업, 경영평가, BTL(Build-Transfer-Lease·민간이 공공시설을 짓고 정부가 이를 임대해서 쓰는 민간투자사업 방식) 등 분야도 가리지 않는다. 해외나 서울에서 뭔가 하나 떴다 하면 그와 유사한 정책과 사업들이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쏟아진다. 가장 먼저 그 정책이나 사업을 입안하거나 제안한 사람은 그 사업을 지속하기 힘들다. 왜? 전국을 돌아다니며 컨설팅하고 강연하느라 바쁘니까. 그렇게 하나의 아이템이 몇 년 바람을 타서 예산을 독식하는 현상이 지속되다가 시들해질 때쯤이면 또 새로운 ‘핫 아이템’이 등장한다. 그렇다 보니 예술단체 중에는 전문예술법인으로 지정된 후 사회적기업을 신청했다가, 협동조합으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곳도 있다. 쌀이 없어 배가 고픈데 쌀 대신 나오는 사탕은 손에 쥘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형국이다.
“콘텐츠는 그대로인데 그때그때 ‘촉을 발동해서’ 지원서를 바꿔 내는 기술만 늘고 있다”는 한 예술가의 말은 농담이라기보다 정확한 현실에 가깝다. 연극평론가 김소연의 표현을 빌려 보자면 “쏟아지는 정책들을 따라가느라 현장은 숨이 차다. 정책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제도를 시행한다. 말 그대로 ‘정책의 질주’다. 하지만 막상 현장의 예술가들은 정산을 위해 회계컨설팅을 받으러 다닌다”는 것이다. 또 각종 기금을 타기 위한 지원서류 더미에 신음하는 중이다. 지나친 의지는 정책 과잉으로 이어지고, 정책의 과잉은 현장을 혼란시킬뿐더러 단기간의 성과에 집착하게 된다. 현장 없는 정책은 존재할 수 없고 ‘정책이 실현되는 곳은 결국 현장’이므로, 현장에서 소화되지 못하는 정책은 결국 실패다.
물론 정책이 시대의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행을 선도하고, 시류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건 정부보다 민간의 몫에 가깝다. 정부의 역할은 민간의 창의력과 유연함을 지원하는 것이지, 그 유행을 정책으로 만들었다가 유행이 지나면 정책을 바꾸거나 없애 버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책이야말로 유행에 뒤떨어질 필요가 있다. ‘투입 예산 대비 수혜 인원’으로 실적을 따지기만 한다면 ‘투자 대비 효과’를 최우선시하는 기업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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