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부터 시작된 반짝 경제호황으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향락 산업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룸살롱’ 접대문화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도시 뒷골목에는 사창가가 늘어났다. 급격한 산업화와 농촌공동체 붕괴가 이루어지면서 ‘무작정 상경’의 시대 그 틈바구니 속에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약자인 여성들이었다.
그 무렵, 서울 제일의 환락가는 무교동이었다. 현대 삼성 대우 같은 대기업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샐러리맨’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접대, 회식 문화가 생기면서 옛 노래나 부르며 막걸리를 팔던 술집은 도시 변두리로 물러나고 맥주를 팔고 근사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이 접대를 하는 새로운 종류의 술집들이 생겨났다. 이름 대신 번호로, 저녁에 출근해 아침에 퇴근하는 새로운 형태의 직업을 가진 여자들 ‘호스티스’가 생겨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들을 주목한 것이 ‘영화’였다. 예술작품에 대한 통제와 검열이 극에 달했던 1974년과 75년에는 역설적이게도 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영화와 주제가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74년과 75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별들의 고향’과 ‘영자의 전성시대’ 모두 호스티스가 주인공이었다.
최인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1973년)은 이듬해 영화로 만들어져 4월 2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105일간 장기상영을 하며 서울에서만 46만 명 동원이라는 기염을 토한다. 고등학교 때 이미 신춘문예에 입선한 ‘천재작가’ 최인호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지만 훗날 그는 한 인터뷰에서 “체제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체제를 수호하려는 이들로부터는 퇴폐주의라는 양날의 협공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별들의 고향’은 ‘오경아’라는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멋진 육체를 가진 처녀’가 각양각색의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지만 매번 버림을 받고 결국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비명횡사하는 슬픈 이야기다.
작가의 말대로 ‘경아는 우리들이 함부로 소유했다가 함부로 버리는, 도시가 죽이는 여자’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 영등포 근처에서 셋방살이를 시작한 경아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불행이 시작된다. 음대 성악과에 들어가지만 가난 때문에 6개월 만에 대학을 포기한다. 생계를 위해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해 ‘영석’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뜻하지 않게 아이를 갖게 되어 낙태를 하고 버림받는다. 과거를 숨기고 전처와 사별한 중소기업 사장과 한 결혼도 과거가 탄로나 또다시 버림받고 호스티스로 전락한다. 이후 미술학도 ‘문오’를 만나 동거하지만 그 역시 경아를 버린다. 경아는 결국 술집에서 만난 이동혁에 의해 철저히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영화 ‘별들의 고향’은 당대 톱스타 신성일과 아역배우 출신 안인숙을 주인공으로 “경아, 오랜만에 함께 누워보는군” “아저씨, 추워요. 안아 주세요”처럼 아직도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회자되는 명대사를 남겼다. 또 ‘쎄시봉’의 멤버였던 이장희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한잔의 추억’ 등을 담은 OST를 만들어 영화 음악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영화가 히트하자 전국에 술집 여급들이 ‘경아’로 이름을 바꿔 부르고 남자들은 ‘경아가 불쌍하다’며 술잔을 기울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별들의 고향’ 개봉 이듬해인 1975년 개봉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조선작의 소설(1973년)을 원작으로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것으로 그해 총 39만8000명의 관객을 동원한다. ‘별들의 고향’에 버금가는 히트였다. 개봉 당시 포스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만난 여자, 우리가 사랑한 여자, 우리가 버린 여자.’
주인공 영자의 삶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무작정 대도시로 온 시골 처녀들의 인생행로를 흡사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부잣집 식모가 된 영자는 주인집 철공소에서 심부름하는 직공 창수와 사랑하게 되지만 창수는 군에 입대해 베트남으로 떠난다. 이후 영자는 주인집 아들에게 욕을 당한 뒤 쫓겨나 봉제공장 여공, 버스안내양 등을 전전하다 만원 버스에서의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창녀’로 전락한다.
그렇게 3년이 흐르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창수는 목욕탕 때밀이로 일하게 된다. 그는 우연히 경찰서 보호실에서 영자를 발견하고 하루 빨리 돈을 벌어 함께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당시 여주인공 염복순의 ‘(등 전면) 노출 연기’가 화제를 모았는데, 영자의 등을 창수가 눈물을 흘리면서 밀어주는 장면은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에서 보기 드문 가슴 뭉클한 장면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영자는 창수의 장래를 위해 그의 곁을 떠난 뒤 사창가 화재로 숨지고 만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당시 우리나라 교통문화의 중요한 축이었던 버스 여차장의 삶을 다뤄 주목받았다. 두 갈래로 머리를 묶고 앞에는 돈주머니를 찬 소녀들이 가녀린 팔로 억세게 사람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 넣고 첫차부터 막차까지 ‘오라이’를 외치던 모습을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1961년 6월 17일 처음 도입된 ‘여차장제’는 1978년 여차장이 1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성하지만 ‘삥땅’ ‘알몸수색’ 등 인권유린도 수없이 도마에 올랐다.
1974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에는 ‘人間以下(인간 이하) 대우 받는 버스안내원’이라는 제목으로 버스안내원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연사로 나온 김선례 양의 사연이 소개된다.
‘보성운수 소속 시청 앞∼구로동 버스안내양 김 양은 4년 동안 안내양으로 종사, 한 달에 최고 1만5000원의 월급을 받으면서 하루 18시간 이상 중노동을 해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틀 근무 하루 휴무로 새벽 4시에 일어나 (기숙사) 방청소를 하고 뛰어나와 종점을 떠나 다시 종점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3시간. 중간에 3∼5분 쉬는 동안 입금도 해야 하고 화장실도 다녀와야 하고 식사도 해치워야 한다. 화장실에도 스피커 장치가 되어 있어 빨리 나오라고 독촉받는다. 생리(生理) 때에는 처리할 여유마저 없다. 밤 11∼12시에 종점으로 돌아오지만 자동차 청소를 마치고 나면 새벽 1시∼1시 반. 이때부터 잠을 자는데 다시 새벽 4시가 되면 사감이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야 한다.’
당시에는 안내양이 직접 버스비를 받기 때문에 돈을 숨겼다며 알몸수색을 당하고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다. 기사에 소개된 김 양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의례적으로 감독에 의해 검신(檢身)을 당해왔다. 수입금이 적을 때는 검신은 더욱 엄격해지고 이 문제로 교도소에 가야 했던 동료가 줄잡아 40∼50명은 되었다”고 밝혔다. 1976년 1월 5일에는 회사의 ‘삥땅’ 추궁에 이영복 양이 할복자살을 시도하는 등 당시 신문에는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한 안내양들의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어쨌든 1974년과 75년 대중문화의 중요한 사건인 영화 속 ‘경아’나 ‘영자’는 대한민국 산업화 과정에서 이를 악물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혹은 오빠나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기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우리들의 ‘누이’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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