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때 학교를 다녔던 지금의 50대 이상은 70년대 학교와 사회 분위기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혼식) 도시락 검사에서부터 국민교육헌장 외우기, 반공 웅변대회, 학도호국단 등 나라 전체가 ‘병영’처럼 답답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기막혀하겠지만 부모세대 때에는 남자들은 머리가 길다고 바리캉으로 깎이고 여자들은 치마 길이가 짧다고 경찰서에 붙들려 가던 시절이 있었다. 인기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였던 시절이니 좋아하는 노래도 마음대로 부르지 못했던 때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재미있는 글이 있어 인용한다. 유신이 선포된 1972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는 김학규 씨가 2012년 8월 12일 인터넷잡지 ‘레디앙’에 연재한 유신의 추억은 이렇다.
‘74, 75년도쯤이니까 초등학교 3, 4학년 때였을 것이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북한 방송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당시는 무시무시한 유신시대였다. ‘새벽에 산에서 내려오는 자, 담뱃값을 물어보는 자’ 등 간첩 식별법 10가지를 외우면서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으로’ 무장해 있던 나에게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은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간첩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운 간첩 식별법 10가지 중 하나인 ‘이불을 뒤집어쓰고 북한 방송을 듣는 자’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는 이불을 뒤집어쓰기보다는 당당히 방에서 그냥 듣곤 하셨다. …(그 후 어른이 되어) 아버지에게 “그때 왜 그렇게 북한 방송을 들으셨어요?”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대답은 복잡하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알고 싶은데,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강도, 도둑, 교통사고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냐. 북한 방송을 들으면 남한 소식이 생생하게 나오니 남한 사정을 알게 되는 거지!” 정부의 언론통제로 유신에 대한 비판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필자는 또 형형색색 ‘애향단’ 깃발 아래 친구들과 함께 행진하며 등교를 했던 추억도 전한다.
‘일요일이면 동네에 모여 동네 청소도 하고 화단 가꾸기도 해야 했다. 우리는 화단에 칸나도 심고, 코스모스 길을 단장하기도 했다. 만약 참석하지 않으면 명단이 작성되어 불이익을 당했다. 애향단 단장이 되면 팔뚝에 완장을 차고 동네별로 대오를 이끌 수 있었기 때문에 꽤나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자리였다.’
실제로 72년 4월 4일자 동아일보는 ‘문교부가 새마을운동 지원을 위해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1만5000개의 애향단을 조직하라고 각 시도교육위원회에 시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유신 헌법’에 대해 고치자는 말은 물론이고 문제가 있다는 발언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헌법에 대해 입만 뻥긋하면 잡아가던 시절, 국민들의 자유를 옭아맨 대표적 사례가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었다. 지금 보면 코미디에나 나올까 싶을 정도로 웃음이 나오지만 치안을 담당해야 할 경찰이 남자들의 머리카락 길이와 여자들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기 위해 바리캉과 자를 들고 다니는 광경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73년 3월 10일부터 개정 경범죄처벌법이 발표되면서 신문에는 심심하면 ‘장발 일제단속으로 1만5000명 적발’ ‘장발 가수 방송 출연 금지’ ‘가두 삭발 않고 자진조발(自進調髮) 권장’ 등의 기사들이 등장한다. 그래도 장발자가 속출하자 76년 5월 14일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전국 경찰에 일제 추방령을 내리고 ①남녀의 성별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긴 머리 ②옆머리가 귀를 덮고 뒷머리카락이 옷깃을 덮는 머리 ③파마 또는 여자의 단발 형태 머리를 하는 남자들에 대해 ‘뒷머리 하단은 이발기로 깎고 면도를 하며 옆머리카락 길이가 귀 윗부분에 닿지 않도록 짧게 올려 깎으라’는 구체적 지시를 내린다. 서울에서는 툭하면 일제단속이라는 걸 하면서 시내에 임시 이발소까지 설치하여 즉석에서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기도 했다.
두발 단속 전통은 80년대 5공 시절에도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는데, 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어 터진 노동자대투쟁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내건 요구 중 하나가 ‘두발 자유화’였다고 한다.
여자들의 미니스커트 단속도 이뤄졌다. 치마 끝이 무릎에서 17cm 이상 올라가면 단속 대상이 됐다. 1973년 3월 10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10일 오전 9시경 서울 명동 N다방 ‘레지’ 강모 양(23)이 무릎에서 한 뼘 이상 올라간 초미니 스커트차림으로 다방근처 빌딩에 커피 배달을 나갔다가 경찰에 적발돼 경범죄처벌법의 취지와 벌칙을 설명 받고 훈방됐는데 강 양은 “맞춰놓은 옷이라 버릴 수도 없고 새 옷을 해 입을 돈도 없어 고민”이라고 울상을 지었다.’
73년 4월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길을 걷던 김모 양이 즉결에 넘겨져 이틀간 구류를 살았다’(28일자 동아일보)는 기사도 보인다. 이러다 보니 아가씨들이 미니스커트 길이가 괜찮은지 파출소에 물어보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유신의 추억’에서 ‘금지곡’을 빼놓을 수 없다. 1975년 6월 21일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공연물 정화대책에 따라 ‘잘 있거라 부산항’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대중가요 43곡을 1차 ‘금지곡’으로 결정하고 방송 및 판매보급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어 발표된(7월 12일) 2차 금지곡엔 이장희의 ‘그건 너’ ‘한잔의 추억’, 김성근의 ‘생일 없는 소년’ 등 당시 대중이 애창하는 인기곡이 대거 포함됐다. ‘그건 너’와 ‘한잔의 추억’은 곡과 가사가 퇴폐 저속하고 ‘생일 없는 소년’은 지나친 비정과 비탄조라는 것이 이유였다. 74년 레코드가 100만 장이나 팔리는 당시로선 놀라운 대기록을 세운 신중현의 ‘미인’도 금지곡으로 묶였다. 가사나 곡 자체에는 문제점이 없으나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영향이 좋지 못하다는 점이 이유였다.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의 ‘붉은 태양’이 북(北)의 어떤 인물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75년 최고 인기가요로 꼽힌 송창식의 ‘왜 불러’도 금지곡에 묶였다. 이렇게 묶인 노래들은 75년 한 해에만 225곡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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