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정동]‘밀양 송전탑’ 절차적 합리성을 존중하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일 03시 00분


이정동 서울대 교수·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이정동 서울대 교수·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우리나라가 성공적인 경제발전의 모범 사례로 손꼽히게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선진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마지막 고비는 바로 사회적 갈등의 성숙한 해결이다. 최근 밀양 송전탑 건설과 관련한 사회적 갈등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문제가 우리 사회의 진정한 성숙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밀양의 송전선로 건설 문제가 8년여를 끌어온 데 대해 오늘 이 시점의 한전을 상대로 왜 진작 해결하지 못했느냐고 타박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은 좀 더 복잡하다. 무엇보다 갈등의 발생 초기 단계에 제도적, 법적 장치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협의의 폭이 넓지 못했던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고, 제도권 내에서 합리적으로 풀어가기 위한 절차 마련에 소홀했다.

최근 국회가 중재자로서 나서, 주민들이 요구한 전문가협의체 구성을 적극 수용하면서 객관적 의견을 모으는 절차를 다시 밟아가고자 노력한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 쟁점이 맞서는 갈등 상황에서 정치권이 제안한 것은 ‘전문가’들의 객관적 의견을 충실히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협의체를 구성하고, 그 의견에 근거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절차적 합리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어떤 사회적 갈등요소에 대한 결정을 하면서 전문가의 의견과 절차적 합리성을 충실히 존중할 수 있는 국가가 곧 선진국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40일간의 협의체 운영 후에도 논란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협의체에 참여한 절반 이상의 전문가들이 지중화 등 현재 제시된 대안들이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절차적 합리성을 세우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에도 협의체의 의견을 존중해 듣기로 한 것이고, 이에 당사자들이 동의하여 숫자를 꼼꼼히 맞추어가며 협의체를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이번처럼 협의체의 다수 의견이 무시되고, 모든 절차적 과정을 없었던 듯하고 나면, 앞으로 또 다른 그 어떤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해 나갈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물론 다수의 전문가들이 제시한 대로 송전선로 건설을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정부와 한전이 주민들의 뜻을 수렴하고 유형적, 심리적 고통을 보듬으려는 노력은 마땅히 계속해야 한다. 송전탑이 들어서는 주변 지역에 대해 충분한 보상방안이 입법화되어 우선 당장 밀양 주민들의 재산권부터 확실히 지켜주어야 한다. 또한 재산권 문제뿐 아니라 주민 우선의 논의과정, 자연친화성, 전통에 대한 존중, 상호존중의 대화 분위기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지역주민들의 의견들이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잘 정리되고, 적극 반영되어 향후 우리나라 송전사업 수행과 관련한 각론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이는 밑받침으로 삼아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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