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창고에 처박혀 있었을까요, 제단에 모셔져 있었을까요? 뉴스에서 스치듯 지나쳤어도 눈이 저절로 가는 그 늘씬한 금동불상이 단지 재산을 은닉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라면 그 이상한 세상의 슬픈 코미디에 그냥 웃어줘야 할까요, 손가락질해야 할까요?
전두환 일가의 압수수색 때 거명된 작가들은 명예스러울까요, 불명예스러울까요? 거기 끼어도 창피하고, 끼지 않아도 창피하다는 친구 작가의 얘기를 듣고 우리 모두 빵 터졌습니다. 예술이 예술가의 정신을 배반하며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축적해 가는 세상에서 예술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지난주에 ‘낙원을 그린 작가 고갱’ 전에 다녀왔습니다. 문제의식으로나 크기로나 고갱의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겠습니다. 그림의 전체 배경색은 블루인데, 신비한 블루가 아니라 우울한 블루입니다. 나는 그 배경색의 침울함에 질리고,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무거움에 질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니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갑자기 직장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지금껏 터전이었던 모든 것을 등질밖에요.
고갱은 문명의 옷, 그 관념의 탑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하긴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란 물음을 던지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찌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어찌 누릴 것 다 누리게 하는 것으로 잡아둘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누리고 싶었던 것은 파티의 소란함이 아니라 맨발의 감촉이고, 그가 입고 싶었던 것은 문명의 옷이 아니라 나무의 향기고 여인의 향기인데. 고갱은 이렇게 썼습니다.
‘태양처럼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아름다워 자꾸만 쳐다봅니다. 여인의 맨발을 보고, 나도 맨발이 됩니다. 햇빛을 머금은 나무의 향기를 맡으며 맨발로 온 들을 거닐었습니다. 여인이 그립습니다.’
고갱은 누리고 싶은 것과 누리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그의 내면에 체증으로 남아있는 것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 같지요? 내가 주목하는 그림은 ‘황색의 그리스도’와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입니다. ‘황색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림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기보다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만들어내는 평화에 조응이라도 하듯 흰 두건을 쓴 여인들도 십자가 주변에 차분히 앉아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은 불경스럽게도 그 그리스도를 자기 얼굴의 배경으로 쓰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 자신감을 어쩌지요?
그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갱이 스스로를 그리스도라 믿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건 자신을 인류의 구원자라 믿으며 망상 속에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감수한 영혼이라 믿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평화로 거듭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조용히 감수해야 하는 걸까요? 그 후 타히티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쉽지 않았던 고갱의 삶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 고통 받았고, 어설프게 흘러들어간 문명에 실망했고, 죽은 아이 때문에 절망했습니다. 결코 낙원의 행복을 누렸다고 할 수 없는 그의 타히티가 아름다운 건 바로 거기서 철학적인 물음이 개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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