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의 경제 프리즘]디트로이트 파산이 부럽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6일 03시 00분


허승호 논설위원
허승호 논설위원
미국 디트로이트 시가 파산을 선언했다. 부채 규모 185억 달러(약 20조6000억 원)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이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쇠퇴로 시(市) 세수가 감소하면서 재정난에 빠졌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도시 자체의 기능 상실로 인한 쇠락 과정’이다.

그게 본질이다. 그런데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역대 시장(市長)과 공무원들이 시 살림은 살피지 않고 흥청망청 돈을 써댄 것이다. 한때 30만 개나 되던 제조업 일자리 수는 2만7000개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구조조정은커녕 분에 넘치는 복지를 약속했다. 시 예산의 38%가 공무원 교사 경찰 소방관 등 은퇴한 공공근로자의 연금 지급에 들어간다. 이런 식이니 빚이 연간 시 수입(10억 달러)의 18배를 넘어버린 것이다.

디트로이트는 모타운(Motown)이라 불린다. ‘motor town’의 준말로 세계 자동차산업의 메카에 붙은 애칭이다. 1950, 60년대 미국에서 주민소득 1위 도시였다. 연방정부는 왜 이런 도시의 파산을 보고만 있을까.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이라면서.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대학에서 F 학점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공부 못하는 학생이 미워서도 아니고, 징벌 자체가 목적도 아니다. 이 제도로 인해 모든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 민간이 공공부문에 비해 역동적인 데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언제든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이유 중 하나다. ‘어떻게 미국에서 이런 일이…’라고 갸우뚱할 일이 아니다. ‘공공부문에서도 이렇게 냉정하니 미국이 최강 자리를 유지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자주 파산한다. 1950년대 이후 61곳이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1990년대 이후에도 뉴욕 시, 워싱턴DC, 마이애미 시, 오렌지카운티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곳들도 재정위기나 파산을 경험했다. 재정난에 직면한 시장이나 주지사가 돈 많은 중국 자본시장에 날아가 “우리 지방채를 사 달라”고 호소하는 사례가 잦다. 파산을 계기로 구조조정을 단행해 도시가 회생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중앙정부가 지방 재정을 직접 통제하면 파산 사태는 피할 수 있다. 1995년 지방자치제 도입 이전의 한국이 이런 방식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자치권을 주려면 파산할 권리도 함께 줘야 한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다. 또 자치는 본질적으로 균형발전과 길항(拮抗) 관계다. ‘잘하면 성공하고 게으르면 망하는’ 자치의 원리를 존중한다면 ‘중앙이 조정권을 행사해 모두를 엇비슷하게 끌고 가는’ 균형발전의 가치를 일정 부분 양보할 수밖에 없다. 자유와 평등의 관계와 비슷하다.

한국에도 디트로이트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경로를 걷는 도시가 여럿 있다. 호화 지방청사, 손님 없는 공공개발 리조트, 낭비성 축제, 경제성이 없거나 철거 논의까지 나오는 경전철, 빚만 남기는 국제 스포츠 행사…. 공명심에 눈먼 단체장들이 비용편익 분석이나 사업 타당성 검토를 정직하게 하지 않고 내지른 ‘거대한 오물덩어리’들이다.

지자체와 지방공기업의 부채가 99조 원을 넘어섰다. 지자체 평균재정자립도는 2009년 54%에서 금년 51%로 떨어졌다. 지방세로는 공무원 인건비조차 충당 못하는 곳도 국내 244개 지자체 중 절반을 넘는 125개다. 지자체의 ‘낭비 경쟁’에 온 국민이 볼모로 잡힌 모양새다.

한국에서도 빚투성이 도시가 파산할 수 있을까. 2010년 경기 성남시가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미국의 ‘연방파산법 제9장’ 같은 지자체 파산 제도가 없다. 제도의 유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우리 정치와 여론이 지자체 파산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글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말만은 분명히 할 수 있다. 망해야 할 놈은 망하게 놔둬야 대한민국 전체가 파산하지 않는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디트로이트#파산#재정난#지방자치제#모라토리엄#성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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