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借名)계좌를 이용한 저축은행 비리 규모가 2006년 이후 6조7546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 차명계좌를 이용한 저축은행 비리는 적발된 것만 2383건이나 됐다. 저축은행이 이 정도라면 규모가 훨씬 큰 은행, 보험사 등에는 수십조 원의 차명계좌가 있을 것이다.
최근 탈세와 해외 재산도피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비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수백 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가족은 재산을 숨기기 위해 노숙인의 이름까지 사용했다. 2011년 태광그룹 수사에서는 무려 7000여 개의 차명계좌를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차명계좌를 이용한 탈세, 비자금 조성, 자금 세탁, 편법 증여나 상속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국세청이 특별 관리하는 차명 재산만 2011년 기준 3만1502건, 4조7344억 원에 이른다.
12일이면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만 20년이 된다. 1993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긴급 명령을 발동해 시행한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부패 고리를 끊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성공에 자족하지 말고 그동안 금융실명제 시행 과정에서 나타난 허점을 보완할 때가 됐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현행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는 계좌를 개설할 때 금융회사가 실명을 확인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금융회사가 이 조항을 지키지 않아도 최대 500만 원의 과태료만 내면 그만이다. 차명계좌를 개설하거나 이름을 빌려준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은 없다. 범법 행위를 막으려면 차명계좌 주인과 차명인, 금융회사에 대한 벌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금융실명제를 강화하는 여러 개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차명거래를 전면 금지하고 실제 주인이 나타나더라도 반환 청구를 못하게 하는 법안, 차명 거래에 대해 형사 처벌과 함께 과징금을 부여하는 법안 등이다.
일부에서는 선의(善意)의 피해자가 발생하거나 금융거래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며 차명계좌 전면 금지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기도 한다. 차명계좌를 금지하면 동창회 종친회 총무가 자기 이름으로 회비를 관리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각종 거래에서 은행을 거치지 않고 현찰을 사용하는 등 금융범죄가 더 은밀해질 수도 있다. 정치권이 이런 문제점들까지 충분히 고려해 법안을 정밀하게 다듬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