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라는 이름으로 남들 안 다니는 곳만 골라 다니며, 때로는 현지인도 잘 모르는 곳을 구글 지도와 좌표에 의존해 찾아가는 무모한 여행을 해온 지 10년째.
2년 전 전문용어로 동복(銅복·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대형 화분 형태의 청동제 용기)이고 쉽게 말해 청동 솥단지 하나 보자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헝가리의 이름 모를 시골 마을까지 물어물어 찾아간 적이 있다. 실물을 보는 순간 환호하는 우리 일행보다 어이없어 하는 현지 가이드의 표정이 더 기억에 또렷하다. 그해 동유럽 여행의 주제는 ‘동복을 찾아서’였다.
올해는 러시아의 유명 여름 휴양지인 소치에서 흑해에 몸을 담그는 것도 포기하고 땀 뻘뻘 흘리며 고인돌을 찾아 헤맸다. 피서지 교통 체증 탓에 도로 위에 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새로운 양식의 고인돌을 발견할 때마다 북구의 금발 미녀 보듯 감탄사를 연발했고, 한국인으론 최초일지 모른다는 설렘이 더해져 분위기는 고조됐다. 이것이 답사의 맛 아닌가.
10년 지기들이니 모이기만 하면 각자 꺼내놓을 추억이 많다. 그중 빠지지 않는 화제가 6년 전 다녀온 몽골 서북쪽 끝 바얀얼기 지역 답사다. 일정 중 5일은 낡은 러시아제 미니밴을 타고 가도 가도 차창 밖 풍경이 바뀌지 않는 코스를 달리니 호텔은커녕 여인숙 비슷한 것도 있을 리 없다. 차 바닥을 통해 쿨럭쿨럭 스며드는 흙먼지를 실컷 마시고 해질 무렵엔 물가를 찾아 야영을 했다.
27명의 대규모 원정대를 위해 준비된 것은 몽골 전통 천막집 ‘게르’였다. 줄지어 초원을 달리는 다섯 대의 미니밴 뒤에 트럭 한 대가 뒤따르는 장면이 장관이었다. 트럭엔 대형 게르와 2인용 텐트, 간이 화장실과 부엌용 텐트가 실리고 짐칸 맨 꼭대기에는 귀중한 식량인 살아 있는 양 세 마리가 올라탔다. 낮이면 따가운 햇볕에 노출된 팔다리가 견디기 어렵고 밤에는 정반대로 점퍼를 껴입고 침낭 속에 들어가도 한기가 느껴지는 게 초원의 날씨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한여름에 웬 호사냐고 부러워하지만, 빙하 녹은 하천 물이 어찌나 차가운지 손끝이 아려서 연지 곤지 찍듯 대충 세수를 하고, 발 씻고 이 닦는 것은 눈치껏 ‘패스’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금세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는다. 이유는 많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 뒤 하늘을 가르는 세 쌍의 무지개, 색칠해서 오려붙인 듯 샛노랗게 빛나는 달, 쏟아질 듯 밤하늘을 촘촘히 뒤덮은 별무리가 여행 도중 문득문득 찾아오는 기쁨이라면, 해발 3000m 고지를 말을 타고 올라 타반보그드 산의 만년설을 가슴에 품은 순간은 영구 저장했다가 틈틈이 꺼내 보고 싶은 감동이었다. 이런 추억을 저장하려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이다.
일본의 저술가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사색기행’에서 “여행의 패턴화는 여행의 자살”이라며 “여행의 본질은 발견에 있으며 일상성이라는 패턴을 벗어났을 때 내가 무엇을 발견하는지, 뭔가 전혀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 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데 있다”고 했다.
새로운 것을 접하려면 떠나야 하고, 떠나려면 미련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도시인들은 미련이 많다. 요즘은 캠핑이라는 이름으로 뭐든 필요한 것은 다 싸들고 가는 여행이 유행이다. 옷을 입고 벗기 편리하게 만든 천장 높은 이너텐트, 4인 가족 이상이 넉넉히 앉을 수 있는 그늘막, 바닥의 한기나 습기를 완전히 차단해주는 푹신하고 두툼한 침구, 바비큐 그릴과 의자까지 다 갖췄는데도 필요한 도구는 점점 늘어나고, 점점 고급화된다. 이에 맞춰 자동차 트렁크도 점점 더 큰 것을 선호한다. 대형 아이스박스에 삼겹살과 소시지, 매운탕거리를 가득 채워가니 향토 먹거리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비우고 떠나면 여행은 알아서 그만큼 채워 준다고 한다. 반대로 가득 채워 떠난 여행은 쓰레기만 버리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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