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뭇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회중전등을 켜고 우리들의 추억을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아들아, 세상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은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빨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서울을 벗어나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그제 찾아간 전주는 수은주가 체온을 넘는 37도로 치솟고 있었다. 팔팔 끓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8월 8일의 대지였다. 전날은 37.6도까지 올랐다 한다. 열기가 마치 몸의 에너지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내는 느낌이다. 이른바 기가 빠져나간다는 것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다. 한밤에 TV를 켜니 ‘폭염의 공습’에 철저히 대비하자는 방송이 더운 전파를 타고 흘러나온다. 낮엔 무더위, 밤엔 열대야에 시달린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어서 8월이 빨리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에어컨과 선풍기의 기계 바람으로도 다스려지지 않는 이 강렬한 여름날에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계절 초입부터 입만 열면 덥다고 투덜대느라 해 떨어진 하늘 한 번 제대로 올려다볼 틈도 없었던 우리들은 언제나 그러하듯 여름과 작별하고 난 뒤에서야 헤어진 여름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1979년 여름 설악산 입구에 터를 잡은 원로화가 김종학 씨는 줄기차게 설악의 사계를 그림에 담는 여정을 통해 인간의 그런 어리석음을 떨쳐냈다. 봄에는 봄, 여름에는 여름, 가을에는 가을, 겨울에는 겨울을 그리면서 그때그때의 찬란한 풍경과 열애에 빠졌다. “서양 현대미술을 공부한 것에 전통미를 ‘컨닝구’하면서 비빔밥을 만든 것”이란 그의 설명처럼 기법은 서양화인데 정신은 동양화의 기운생동(氣運生動)을 지향한다. 사계절 그림 중 여름을 담은 캔버스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대자연의 생명력을 분출한다. 햇볕 쏟아지는 풀숲을 헤매며 울긋불긋한 꽃과 온갖 벌레를 열심히 바라보고 또 바라본 뒤, 대상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돌아와 바로 화폭에 쏟아낸 작업이다. 들풀 칡덩굴 나비 냇물…. 대지의 생명력과 녹음방초가 현란한 색채와 아이의 몸짓처럼 거침없는 붓질로 어우러진 풍경은 우리 속에 갇혀 자연을 바라보는 도시인에게 생명체의 기운이 연중 가장 충만하고 농익은 한여름, 그 성하(盛夏)의 매혹을 일깨운다.
더우면 폭염이라고 비 오면 폭우라고 아우성치는 사이 자연의 시간은 소리 없이 흘러 입추를 지났다. 이렇게 우리 생애 또 한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들판에 열린 곡식과 과일은 바로 이 더위를 먹고 알차게 여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오곡백과 풍성한 추석이 올 것이다. 오늘 밤은 더위와 싸우겠다는 생각 대신 열손가락에 달을 매달고 별을 바라보고 싶다.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이니…. 자연의 시절이나 사람의 시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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