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강물은 지리산 고원분지 운봉 땅에 고리를 박고 줄을 매달아 동편제 판소리 한가락으로 흐른다 내가 발자국으로 걸어온 몇 백리 길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며 흐르고 흐른다 산내, 운봉, 주천, 구례, 하동으로 싸리꽃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산속 막걸리주막의 외롭기만 하다는 할머니의 긴 넋두리도 흐른다 쌍계사 화개장터를 내려와 막차표를 끊어놓고 잠시 남도대교 아래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피라미떼를 본다 강 건너 초록의 대숲 시퍼런 낫으로 산죽을 치는 소리 휘어 활시위소리 내며 흐른다 강물에 뜬 둥근 낮달에 늙은 내 얼굴을 비추어본다 멀리 있는 그대에게 흐르는 물로 초록의 편지를 쓴다
기행시(紀行詩)는 별 매력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읽은 기행시들은 대개 자연풍광과 시인 개인의 감상이 범상하게 담긴 시들로서 시인과는 생판 남인 나, 독자는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천금순이 순례하는 마음으로 우리 국토를 한 걸음 한 걸음 더듬어 다니며 길 위에서 쓴 시들을 묶은 시집 ‘아코디언 민박집’은 꽤 읽음직스러웠다. 시간과 돈에 여유가 나면 너도나도 해외로 나가는 요즘 풍조에, 우리 땅은 외국보다 낯설어 시의 소재로도 신선하다. ‘섬진강변에서’는 그 시집에서 옮겼다.
섬진강! 나는 어딜 별로 가고 싶어지지 않느니만큼 당최 가본 데가 없는데, 섬진강만은 늘 한번 가보고 싶었다. 실존 장소일까 싶은 나의 로망, 섬진강. 천금순 시인처럼 그 강변 굽이굽이를 타박타박 하염없이 걸어봤으면…. 남도 풍경에는 특유의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다지. ‘싸리꽃 찔레꽃 흐드러지게 핀 산속’. 싸리꽃의 ‘싸’와 찔레꽃의 ‘찌’, 이 상큼하게 센 소리처럼 꽃향기 알싸하게 코를 찌르고, 자디잔 꽃 흐드러진 덤불이 눈에 아른거리네. 아른아른 맑은 물비늘처럼 은피라미떼 지나가는 섬진강, 외딴 막걸리주막 할머니의 외로움같이 심심하고 깊은 섬진강. 시는 눈으로, 코로, 귀로, 섬진강변을 생생히 전한다.
혼자 하는 도보여행은 삶의 찌든 때를 씻어주리. 발이 부르트도록 걸으면서 이것저것 되돌아보고 다른 고장 풍경과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생기를 되찾고 품이 넓어지리. 정신의 살은 찌고, 몸의 살은 많이 빠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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