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극적인 허구성 없이 그 전개에 따라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나 소설, TV 드라마.’ 국어사전은 ‘다큐멘터리(documentary)’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영화사전을 찾아봤다. ‘허구가 아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허구적인 해석 대신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영화’라고 설명돼 있다.
최초의 현대적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는 무성영화 시절인 1922년 미국에서 개봉된 로버트 플래어티 감독의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10여 년간 북극 에스키모 원주민의 일상을 카메라에 생생히 담은 이 영화는 당시 대중적 흥행과 함께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논픽션 영화’라는 점에서 기록영화로도 불린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영화가 과연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느냐는 점에선 논란이 분분하다. 감독이나 제작진이 현실의 한 측면만을 강조하거나 관객을 특정한 관점으로 유도하기 위해 연출 등 주관적 개입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극장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물론이고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TV의 리얼 프로그램들이 의도적 연출과 편집으로 조작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선 현실성 추구에 매몰돼 단편적 사실만 늘어놓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필름 낭비’라고 주장한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석을 더해 사회적 의미를 확대 재생산하는 공익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느 정도의 ‘주관성’은 필요악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큐멘터리의 힘과 생명력은 객관적이고 균형감 있게 현실을 관찰하는 데서 나온다고 나는 본다. 영화 속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전혀 동떨어진 한쪽의 주장에 치우치거나 허구적 요소가 가미될 경우 ‘팩트(fact) 추구’라는 다큐멘터리의 근본 원칙이 훼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정치적 이념적 도구인 ‘선전영화(propaganda film)’로 전락할 소지도 다분하다.
그런 점에서 천안함 폭침 원인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에 쏟아지는 우려스러운 시선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영화를 기획, 제작한 정지영 감독은 “나 스스로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정부 발표를 납득할 수 없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또 영화 제작진은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면 종북주의자로 몰린다. 의심은 소통의 출발점인데 우리 사회는 소통이 없다”고 했다. 두 주장 모두 동의하기 어렵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은 미국과 호주, 영국 등 국내외 70여 명의 민군 합동조사단이 과학적 실험과 치밀한 검증을 거쳐 내린 공식 결론이다. 영화는 이 결론을 반박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증거나 자료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에 인터넷 매체 서프라이즈 신상철 대표와 선박 인양 전문가로 알려진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를 주로 등장시켜 그간의 의혹을 재탕 삼탕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씨는 암초 좌초설을, 신 씨는 제3국 잠수함과의 충돌설을 줄기차게 제기해왔다. 이들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국방부는 충분히 논리적으로 해명했고 그 내용은 정부가 발간한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에도 실려 있다.
영화는 소통을 내세우면서 정작 천안함 희생자의 유족이나 생존자는 물론이고 조사작업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담지 않았다. 정부의 소통 부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스스로 불통(不通)의 도그마에 빠진 것이다. 객관성과 균형감을 상실한 채 궤변과 억지에 가까운 주장을 사실인 양 부각시켜선 영화 제작의 취지도 살릴 수 없고 대중의 공감도 얻을 수 없다.
최근 해군 현역 장교와 천안함 유족들이 영화가 사실을 왜곡하고 당사자의 명예를 훼손한다며 법원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 제작사 측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법적 맞대응 방침을 밝혔다. 대중을 오도하고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부채질하는 영화는 개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다음 달 영화가 개봉된다면 관객들은 극장을 찾기 전 국방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천안함 피격사건 백서를 꼭 일독하길 권한다. 그것은 영해를 지키다 적의 기습으로 산화한 46명의 용사와 유족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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