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동아일보 기자를 보자 돌연 앞이마에 ‘박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4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0>취기(醉氣)

1979년 5월 언론계 신문 방송 통신사 대표들과 환담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에 영애 근혜 양도 보인다. 동아일보DB
1979년 5월 언론계 신문 방송 통신사 대표들과 환담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에 영애 근혜 양도 보인다. 동아일보DB
이날 만찬은 박정희 대통령이 소탈하고 편안한 대화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다시 강성재 기자의 회고다.

‘대부분의 기자들을 볼 수 있는 중앙의 교자상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박 대통령은 기자들이 피운 담배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고는 금연(禁煙)을 화제로 말문을 열었다. 당시 목감기 기운이 있던 대통령은 “하루 3, 4갑을 태우던 담배를 최근 끊어가고 있다. 어제는 두 대를 피웠다”면서 담배를 끊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울 적에도 집에 와서는 피우지 않았다면서 “TV 연속극에서 담배를 멋있게 태우는 탤런트들을 보면 피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기자들은 상춘재 방안에서 새로 도배한 장판지 냄새를 맡으며 바로 전날, 같은 자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이 신임 여당 간부와 신임 국회 상임위원장들을 불러 축하 만찬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경호 책임자에 불과한 사람이 여당과 국회 간부들을 초대해 만찬을 베풀었다는 것은 차 실장의 파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기자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런 기자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박 대통령이 먼저 “이 별채를 지은 뒤 집들이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들이 많았는데, 마침 며칠 전 국회 간부들이 새로 뽑혀 (차 실장에게) ‘여당 신임 간부들까지 합쳐서 네가 한잔 내라’고 얘기해 어젯밤에 축하만찬이 있었다”고 했다.

정작 기자들이 놀란 대목은 대통령이 차 실장을 향해 ‘너’라고 호칭하는 부분이었다. 마치 부자(父子)처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차 실장에 대한 언급이 끝나고 바로 박 대통령은 작심한 듯 내놓고 YS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다시 강 기자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취기(醉氣)가 상승작용을 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거산(YS의 호)이 백두진 의원의 국회의장 취임을 반대했던 것을 겨냥해, “백 의장이 유정회 의원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면, 유정회 의원을 뽑는 통대(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도 선출된 만큼, 나에 대해서도 반대하겠다는 뜻이 아니냐”며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거산을 정면 공격하기 시작했다. “김영삼이가 유신체제를 뒤엎겠다고 나선다면 우리는 ‘예, 예’ 손놓고 있겠느냐. 지금까지 (그가) 법(긴급조치)을 위반한 게 7건이나 되지만 야당 탄압이라는 오해를 받기 싫어 신민당 전당대회(5월 말) 전엔 절대 안 잡아넣는다. 김영삼이는 절대로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물러나고 김영삼이든 누구든 집권해서 국민이 행복하게 된다면 언론이 밀어주어도 좋다.’

당시 강 기자는 대통령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조금 뒤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다. 박 대통령이 여과되지 않은 언어로 YS를 비난하다 화제를 갑자기 언론으로 돌린 것이다. 강 기자는 당시 정부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신문이 동아일보였기 때문에 불똥이 옮겨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대통령이 “동아일보 강 기자! 강 기자 어딨어” 찾는 게 아닌가.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면서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했다. 대통령은 약간 언성을 높여 “김영삼이가 동아일보 같은 신문에서 가세해 주니까 힘을 얻어, 무슨 영웅처럼 정치적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내가 물러나고 김영삼이가 (정권을) 잡으면 동아일보가 행복하게 될 거 같애! 동아일보가 그러면 안 돼!”라고 말했다. 방안 분위기가 딱딱해졌다. 타 신문사 기자가 분위기를 바꿔보겠다는 요량으로 “이제 웬만큼 치안도 정착돼 있으니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시킬 의향은 없으십니까” 묻자 대통령은 지체 없이 “(아예 자정 이후 야간 금지를) 밤 10시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좌중에는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농담인지 진담인지가 헛갈렸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언론에 대한 질타(?)가 끝나자 몇 개월 전에 출간한 자신의 저서 ‘민족중흥의 길’ 인세 문제를 화제로 삼았다. “인세가 1900만 원이나 되었는데, 모두 새마을 성금으로 기탁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냉정을 되찾은 대통령은 자신이 너무 말을 헤프게 했음을 의식한 듯, “이건 모두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라고 못을 박고는, 근혜 씨에게 “아버지가 취해서 다 털어 놓기 전에 사인(신호)을 보내라”고 했다.

이날 저녁 박 대통령의 말들은 깊숙한 정치 얘기에서부터 술 깨는 비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모두 자리를 파하고 일어선 시각은 만찬 시작 1시간 반가량이 지난 저녁 7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결코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술을 못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취기를 느낀 상태였다.

모두들 밖으로 나왔는데 또다시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 정원 잔디밭에 서서 만찬을 마치고 나오는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강 기자의 회고다.

‘대통령이 배웅할 태세를 취하자, 기자들은 자연스레 일렬로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평소 술에 약간 취해도 일어날 때는 당당한 자세로 사람들을 대하는 대통령이었는데 이날은 어쩐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날 밤 대통령이 마신 주량은 알 수 없지만, 막걸리 세 사발 이상은 마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날따라 다변(多辯)이어서 음주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대통령의 심신이 피곤해진 탓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네 번째인가로 몇 걸음 나아가 대통령 앞에 섰다. (그런데) 임방현 청와대 대변인이 무슨 생각에선지 “아, 동아일보 강성재 기잡니다”라고 새삼스러운 소개를 했다. 그러자 다소 흔들렸던 박 대통령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잡더니 “뭐! 강 기자라고?” 하더니, 갑자기 머리로 내 앞이마를 들이받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다시 강 기자의 말이다.

‘내가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데, 대통령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만지면서 “얼얼한데” 했다. 나 역시 대통령 표현대로 얼얼했지만, 취기 때문인지 아프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취기를 알아차린 대변인과 근혜 씨가 대통령의 양팔을 부축하고는 어두워진 본관 쪽을 향해 걸어갔다.’

멀어지는 대통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 기자는 ‘한 나라 명운과 절대 무관하지 않은 국가원수가 저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다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동아일보 기자와 박치기를 했다”는 소식은 다음 날 언론계에 쫙 퍼졌다. 그것이 정보 관계자들을 통해 부풀려지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동아일보 기자를 청와대 출입 금지시킬 것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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