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칼럼]신기수의 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9일 03시 00분


조선통신사 연구로 한일우호를 꿈꿨던 신기수
그가 세상을 뜰 때 기뻐했던 한일공동 월드컵 무드는 이젠 어디에도 없다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마저 수포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한일 공동 월드컵의 열기로 두 나라가 들썩이던 2002년 여름, 일본 오사카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던 70대 남자와 일본 기자가 필담을 나눴다. 환자는 식도암 수술로 말을 할 수 없었다. 필담 중 일부.

―‘리틀 서울’이라고까지 불리는 도쿄의 신오쿠보에서는 일한의 젊은이가 월드컵을 보며 대단히 신이 났습니다.

“일본의 젊은이도, 한국의 청년도 베일을 벗어던지고 교류를 시작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현대의 통신사가 오가고 있는 것 같아 기쁩니다.”

환자의 이름은 신기수(辛基秀). 재일역사학자 겸 영상작가로 ‘조선통신사’ 연구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축구에서 통신사를 떠올린 건 그다운 발상이었다. 필담을 나눈 지 몇 달 뒤 그는 세상을 떴다. 향년 71세.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여 년간 12차례나 일본 에도 막부를 방문했던 외교문화사절단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지 불과 9년 만에 시작된 것이나, 500명 안팎의 큰 규모와 정기행사였다는 점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신 씨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불행했던 한일관계의 회복 모델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문헌보다 ‘물건’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 방방곡곡의 절이나 신사, 고택을 돌아다니며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그림, 두루마리, 병풍, 족자, 인형 등을 수집했다. 종종 집을 담보로 잡혔다. 그는 일찌감치 영상의 힘에 주목한 학자이기도 했다. 1979년에 개봉한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라는 영화는 그의 컬렉션에 신념을 입힌 역작이다.

이 영화는 신 씨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들며 일본에 통신사 붐을 일으켰다. 통신사가 지나갔던 지역마다 ‘통신사 연구회’가 만들어지고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마쓰리(축제)도 생겨났다. 통신사가 새로 취임하는 쇼군(將軍)에게 조공을 바치러 온 것이라는 일본 중심의 학설도 수정됐다. 에도 막부가 쇄국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일본 교과서에도 통신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요즘 조선통신사 연구에서는 ‘빛’만 아니라 ‘그늘’도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조선통신사 한일교류의 여러 양상’, 나카오 히로시·하우봉 외, 2012년, 보고사). 통신사 접대에 막부의 1년 예산이 들어가는 바람에 농민 봉기까지 벌어졌던 사례나 외교 의례를 둘러싼 갈등의 연구와, 한일 양자 관계가 아니라 중국까지를 포함한 복안(複眼)적 분석도 필요하다는 의견 등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도 꼼꼼한 1차 자료 연구로 화석화됐던 조선통신사에 숨결을 불어넣고, 역사의 무대 위로 끌어올린 신 씨와 강재언, 이진희 씨 같은 재일 사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신 씨 본인도 통신사라는 ‘빛’에만 매몰됐던 건 아니다. 재일조선인의 ‘그늘’에도 관심을 뒀다. 1986년 개봉한 ‘해방의 그날까지-재일조선인의 발자취’라는 기록영화가 대표적이다. 광복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재일조선인의 고난과 투쟁을 자료와 영상, 생존자들의 인터뷰를 섞어 만든 195분짜리 다큐멘터리다.

‘해방의 그날까지’가 광복절 기획으로 15, 17일 두 차례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국내 처음 상영됐다. 150석의 좌석이 모두 찼다. 신 씨는 이 영화를 통해 재일조선인이 핍박만 받았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대의’와 ‘자존’을 위해 싸웠으며, 일본 민중과의 연대투쟁을 통해 일본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부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감상 결과 재일조선인의 아픔과 한이 더 가슴에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영화 상영에 맞춰 신 씨의 세 모녀가 모처럼 서울에서 만났다. 부인 강학자 씨는 평생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였고, 맏딸 미사 씨도 아버지의 영화 제작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둘째 딸 이화 씨는 2년 전 아예 한국으로 와 한국말을 배워 가며 이 영화의 상영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세 사람은 “큰 짐을 덜어 우리가 해방된 것 같다”며 기뻐했다.

흔히들 일본 사회가 재일동포를 차별한다고 말한다. 과연 일본만 그런가. 우리는 제 발로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얻은 사람은 축하하고, 그 자식이 영어를 하면 대견해한다. 그러나 못난 조국을 만난 죄로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간 재일동포와 그 자식들이 고민 끝에 귀화하면 눈을 흘기고, 한국말을 못하면 아비 어미는 뭘 했느냐고 꾸짖는다.

신 씨도 일본과 한국이라는 불편한 틈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썼던 재일동포 지식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는 조선통신사 연구라는 필생의 업을 통해 재일 한국인에게 자존을 주고, 두 나라의 우호 회복을 꿈꿨다. 그 자신이 ‘현대의 통신사’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가 10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한일 우호 무드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신 씨의 꿈이 이뤄질 날은 아직도 먼 듯하다.

※ 이 칼럼은 우에노 도시히코(上野敏彦) 교도통신 기자가 쓴 ‘신기수와 조선통신사의 시대’(2006년 초판 2쇄·明石書店)를 주로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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