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징글하다. 추위를 타는 체질이어서 겨울보다 여름 지내기가 낫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여름은 견디기 힘들다. 원전 시험성적서 조작으로 원전 3기가 추가 정지된 올여름, 절전(節電)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다. 과장을 좀 보태면 북한 핵 위협 때보다 심한 듯하다. 북핵 위기 때는 북한만 주시하면 됐지만 지금은 국민이 찜통더위와 죄의식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전국적으로 200여 개 학교가 개학을 연기하거나 임시휴교를 했다. 교육용 전기료가 가정용보다 싸다지만 그래도 학교운영비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무상급식과 학교 냉방 가운데 학부모와 학생들은 과연 무엇을 원할는지 궁금해진다. 어른은 땀에 절어도 자식은 시원하게 공부시키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보니 학부모 단체가 교육용 전기료 인하 서명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산업용 전기료가 싸다고 욕먹고 있지만 산업체도 피해자다. 정부는 산업용 전기료를 현실화하는 대신 기업에 강제 절전을 요구했다. 많은 기업이 생산라인 가동을 중지했다. 절전 보상금을 받는다지만 강제 절전에 따른 생산 차질 액수가 조(兆) 단위에 이른다. 뭐니 뭐니 해도 공무원들의 고생이 가장 크다. 실내온도 28도를 맞추는 것도 모자라 불볕더위 속에서 지난주엔 사흘 동안 모든 공공기관의 냉방장치를 껐다. 많은 공무원이 ‘공무원 된 죗값’을 톡톡히 치렀을 것이다.
많은 국민이 찜통더위 속에서도 에어컨 한 번 켜지 않았다. 자녀들에게 선풍기를 한 대씩 선물한 사람도 있고 집 안에서 에어컨 트느니 시원한 공공장소를 찾아다닌 이도 있다. 그 덕에 한 지인은 태어나서 영화를 가장 많이 봤다고 한다. 후배 하나는 퇴근하다가 사무실에 멀티탭을 켜 둔 것이 생각나 되돌아갔다고 한다. 에어컨을 켜 놓고 가게 문을 열고 있는 상점을 시민이 휴대전화로 신고하는 모습도 보았다. 이런 걸 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참 착한 백성이다.
크리스토프 칸토와 오딜 팔리우가 공동 저술한 책 ‘인간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해 왔는가’를 보면 19세기 사람들은 20세기에 인간은 기계와 사랑에 빠지고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며 우주를 정복할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한 비관론도 없지 않았지만 누구도 20세기에 전력 위기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진 못했다. 우리에게도 여름에 냉방병 환자가 나오고 겨울에도 반팔 옷을 입던 ‘잘나가던 시대’가 한때 있었다. ‘전기 먹는 하마’인 유리 건물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일 것이다. 지금은 호된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말이다. 단언컨대 앞으로 발전소를 더 짓든, 못 짓든 그런 호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수요가 있는 한 에너지(간단하게 전력이다) 공급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탱하게 한 것은 19세기를 지배한 기술낙관론이었지만 그 믿음이 무너지는 데는 한 세기도 걸리지 않았다. ‘설국열차’가 엔진으로 움직이듯 전력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간단한 이치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의 재생능력을 50% 초과해 자원을 소비하고 있어 고갈은 시간문제다. 전력수급 실패와 요금체계의 왜곡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올해 전력난은 미래에 닥칠 에너지 위기의 ‘맛보기’일 뿐이다. 이제는 전력 공급만능주의에서 벗어나 ‘절전 스타일’을 생활 속에 수용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원전 하나만 멈춰도 블랙아웃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원자력 의존도가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그렇다고 국민이 원자력마피아를 용서하거나 원전을 더 지으라고 할 것 같지는 않다. 일본보다 더 맹위를 떨치는 ‘일본 방사능 괴담’은 방사능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불안과 거부감이 여전함을 보여 준다. 올여름 절전의 고통은 우리 사회가 전기를 덜 쓰는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현재까지 국민은 그 테스트를 잘 통과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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