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량특집인 이 글에는 영화 속 섬뜩한 장면들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심신이 허약한 노약자나 어린이, 임신부는 읽지 않기를 권유해드립니다.
무덥고 짜증나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영화가 제격이다. 진짜로 무서운 영화는 전기톱으로 사지를 썰어대는 영화가 아니라, ‘내게도 저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영화 ‘주온’을 보고 오싹해지는 이유는 가부키 화장을 한 허연 얼굴의 어린이귀신 때문이 아니라, 내가 덮고 자는 이불 속에 귀신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매우 체감적인 공포 때문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지금부터 최근 내가 가장 무섭게 본 영화들을 소개한다. 이들 영화는 비록 피 칠갑을 하는 장면은 없지만,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는 창의적이고 변태적인 설정을 담고 있다.
먼저 5월 국내 개봉된 스페인 영화 ‘슬립타이트’. 아파트 경비원인 대머리 중년남자 ‘세자르’가 이 아파트에 사는 여인 ‘클라라’를 짝사랑한 나머지 벌이는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다.
남자는 황혼녘이 되면 마스터키를 사용해 클라라의 아파트에 당연한 듯 들어간다. 그녀의 침대 밑 공간에 누운 채 숨어 귀가한 클라라가 잠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녀가 잠들면 조용히 침대 밑에서 나와 강력 마취제를 뿌린 손수건으로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아 마취시킨다. 아침이 될 때까지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워 잠을 잔다. 동이 트면 남자는 사라지고, 여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혹은 마취)에서 깨어난다. 남자는 매일 이런 행위를 반복하며 삶의 행복을 느낀다.
어떤가. 나도 모르는 새 이상한 남자가 침대 내 옆에 누워 잔다니….
이걸로 약하다면 14일 개봉한 ‘숨바꼭질’을 강력 추천한다! 신인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치밀하고 경제적이고 안정된 연출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아파트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이 한번쯤 마음에 품어보았음직한 끔찍한 상상들을 고스란히 재연한다. 이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①밤이다. 엘리베이터에 홀로 탄 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까만 오토바이 헬멧을 쓴 채 얼굴을 완전히 가린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함께 탄다.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고 가만히 서있는 남자. 공포에 질린 내가 ‘9층’ 버튼을 누르자, 남자는 돌연 ‘10층’ 버튼을 누른다.
②퇴근한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내 아파트로 들어왔다. 왠지 누군가가 집을 다녀간 느낌. 나는 거실 컴퓨터에 내장된 카메라를 통해 아파트 내부를 녹화해놓은 영상을 살펴본다. 영상에는 검은 헬멧의 남자가 지금 내가 앉은 바로 이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 순간 등 뒤에서 나는 인기척. 영상 속 그 검은 헬멧의 남자가 지금 피가 철철 흐르는 쇠몽둥이를 든 채 서있다.
③괴한이 미친 듯이 아파트 문을 두드리면서 열려고 한다. 경비와는 통화가 되지 않는다. 다행히 자물쇠가 간신히 버텨준다. 문 밖의 인기척이 사라지자 용기를 내어 현관문의 조그만 유리구멍을 통해 밖을 살펴보는 나. 아무도 없구나 하고 안도하는 순간, 괴한의 팔이 현관문 밑 우유투입구를 통해 쑥 들어와 내 발목을 잡는다. 으악!
④드디어 어머니가 아파트를 찾아왔다. 어머니의 소리를 듣고 괴한은 도망쳤다.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 너무도 반갑고 안심이 되는 마음에 어머니를 얼싸안았다. 순간, 아파트 복도 반층 위 계단에서 쭈그린 채 나를 노려보던 괴한. 그는 아파트 문이 열리는 순간을 숨죽이며 기다려온 것이다. 문이 열린 틈을 타 괴한은 ‘다다다다’ 하는 발걸음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내려온다.
이 정도로는 더위가 물러가지 않는다는 강심장 독자들을 위하여 2009년 작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마지막으로 추천한다.
잠든 사이 벽에 걸린 액자가 깨지는 등 집안에 뭔가 의심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직감한 아내와 나. 비디오카메라를 침실에 설치해 잠자는 동안의 침실을 촬영한다. 아침에 일어나 녹화된 테이프를 틀어본다. 귀신같은 건 없었다. 다만 새벽에 스르르 침대에서 조용히 일어난 아내가 잠든 내 앞에 선 채 고개를 숙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아내는 꼿꼿이 선 자세로 3시간이 넘도록 나를 내려다보다 다시 시체처럼 잠든다.
아, 나 같은 대한민국 중년남자로선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오싹한 장면이다. 귀신보다 무서운 게 아내가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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