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철폐 독재타도” 부마항쟁 터지다… 세무서-KBS 공격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6일 03시 00분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7>부산항쟁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이 내려진 부산 시내. 동아일보DB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이 내려진 부산 시내. 동아일보DB
1979년 10월 15일 오전 부산대 도서관.

중간고사를 앞두고 공부에 열중하던 학생들에게 난데없이 유인물이 배포됐다. ‘현 독재 집권층은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라고 적힌 ‘민주선언문’이었다. 이어 ‘도서관 앞으로 모이라’는 유인물이 뿌려졌지만 모인 학생들은 없었다.

이튿날 16일 오전 10시 정광민(상대 2학년)은 인문사회관 306호 강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40여 명이 공부하고 있던 강의실 뒤쪽에서부터 유인물을 나눠주며 이렇게 외쳤다. “학우 여러분!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저 유신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합시다!”

분위기는 어제와 딴판이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학생들은 의자를 박차고 밖으로 몰려 나갔다. 전날부터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잠복하고 있던 사복형사들이 덮쳤으나 이내 학생들의 뭇매를 맞고 도망쳤다. 인문사회관 앞에는 순식간에 100여 명이 모였다. 자연스럽게 “독재타도”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날 학생시위가 그날 저녁에 무려 5만 군중이 참여하는 격렬한 가두시위로 발전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캠퍼스 내 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어깨를 걸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학원사찰 중지하라!” “구속 학생 석방하라!”를 외치며 본관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위대가 정문이 바로 보이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올 때는 무려 700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오전 11시, 시위대는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저지하는 경찰까지 뚫고 거리로, 시내 중심가로 진출했다. 오후 2시 부산 남포동 부영극장 앞 시위는 ‘부산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200∼300명씩 스크럼을 짠 학생들이 남포동과 광복동을 오가며 구호를 외치자 오후 3시경 국제시장에는 2만∼3만 명이나 되는 군중이 모여 구호를 따라 외쳤다. 시위대에 김밥, 우유, 달걀, 박카스, 담배가 줄을 이어 건네졌다. 시민들은 시위대가 쫓겨 가게로 들어가면 셔터를 내려 숨겨주었고 건물 위에서 연탄재, 화분, 재떨이, 병 등을 경찰에게 던지며 진압을 방해했다.

저녁 8시가 넘어서자 시위대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윽고 남포동 파출소가 불타고 경찰 순찰차가 불태워졌다. 3만∼5만 인파가 남포동 일대를 가득 메웠다. “밤 10시부터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는 당국의 발표가 있었지만 시위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파출소 11곳이 불태워졌다. 명실상부 4·19와 6·3항쟁 이후 시민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민항쟁이었다.

다음은 부산민중항쟁 자료집에 있는 부산 시민들의 증언이다.

‘16일 저녁 7∼8시경이 되자 고등학생, 퇴근하던 노동자, 국제시장 주변 주민 등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늘었고 시청 앞은 해방 공간이 됐다. 이날 마지막까지 투쟁한 사람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룸펜, 빈민, 노동자들이었고 학생들은 맨 먼저 이탈했다. …다방 아가씨와 술집의 호스티스까지 나와 박수치고 고함을 질렀다. 세상은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이날 저녁 8시, 부산대는 긴급 교수회의를 열고 무기한 휴교를 결정한다.

다음 날인 10월 17일은 유신이 선포된 지 만 7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날 부산대 학생들에 이어 동아대 학생들까지 시내 곳곳에서 합세했다. 오후 4시경부터 부산 시청 앞 남포동과 광복동에 몰리기 시작한 학생들은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7시경부터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시위의 주도권은 어제처럼 시민들이었다. 넥타이를 맨 퇴근길 회사원들부터 노동자, 상인, 식당 종업원, 재수생, 교복 입은 고교생들까지 나섰다. 시위 양상도 훨씬 격렬해졌다.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 7시 25분경 충무파출소를 불태운 시위대는 ‘언론자유’ 구호를 외치면서 밤 9시에는 KBS부산방송국을 공격했으며 세금인상에 반대한다며 서구청 부산세무서, 서대신 3동사무소 건물을 파괴했다. 시민들은 파출소를 점거해도 무기고에는 손대지 않았고 흉기도 지니지 않았다. 민간인의 재산이나 병원 같은 공공시설은 훼손하지 않았으며 상점에서 물건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다음은 10월 18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유신체제 출범 후 7년 만에 첫 계엄선포를 의결한 이날 국무회의는 자정이 임박한 밤 11시 30분에 열려 50분간 계속됐다. 당초 총무처가 밤 10시 30분경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받고 국무위원들 자택으로 비상연락을 했으나 때마침 이날 밤 유신 7주년 기념 청와대 만찬과 방한 중인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환영 만찬에 참석하고 늦게 귀가했다가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는 바람에 밤 11시 30분이 돼서야 (국무회의) 성원이 됐다.’

박 대통령은 18일 오전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특별담화문에서 “오로지 악랄한 선동과 폭력으로 사회질서를 파괴하고 국리민복을 해치며 헌정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불순분자들의 일체의 경거망동과 불법행위를 발본색원하자는 데 계엄선포의 목적이 있다”며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의 사회활동과 생활에는 추호의 불편이나 위축을 주지 않도록 할 것이며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하여 국력배양에 계속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궂은비가 내리고 어둠이 깔려 스산했던 18일 저녁 7시 55분쯤 남포동 동명극장 앞에 모여든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계엄군이 지키는 시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대검을 꽂은 M16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아대는 공수부대의 진압에 시위대는 흩어졌고 무수한 시민들이 부상을 당하면서 부산 시내는 다시 ‘강요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흘에 걸친 부산 민중항쟁은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 불길은 마산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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