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언덕에서 알았다/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을//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을/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유안진 ‘들꽃 언덕에서’
하마 지금쯤 여름 풀꽃들이 다 이울지는 않았을까. 우르르 돋아난 그 녀석들 얼마나 깜찍할까. 반공중 하늘에 걸린 풀꽃정원 인제 점봉산 곰배령(1164m). 생각만 해도 마음이 달떴다. 마침 지난주 짬이 났다. 득달같이 달려갔다. 딱 석 달 만이었다. 그땐 봄꽃이 흐드러졌었다.
역시 생각대로 둥근이질풀 천지였다. 연분홍꽃들이 해말갛게 웃으며 반겼다. 다섯 장 꽃잎에 실핏줄처럼 퍼진 보랏빛 잎맥이 애틋했다. 영락없는 ‘배냇짓 젖먹이 살갗에 돋은 푸른 정맥’이었다. 억센 둥근이질풀은 전보다 더 널리 퍼졌다. 예년에 많았던 등황색 동자꽃이 확 줄었다. 둥근이질풀에 파묻혀 어쩌다 눈에 뜨일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발그레 달아오른 동자꽃이 유난히 화사했다. 푸른 풀밭 틈새에서 연지곤지 화장한 새색시 같이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노란 곰취꽃과 하얀 참취꽃이 마른 검버섯을 띠면서 숙지고 있었다. 두메고들빼기도 노란 꽃을 열고 껑충 섰다. 하얀 톱풀꽃과 흰진범꽃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자줏빛 엉겅퀴꽃에 너울너울 호랑나비가 코를 박고 있었다. 샛노란 마타리 꽃과 하얀 당귀꽃이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어 ‘우산 꽃’을 펼쳤다.
찬찬히 앉아서 보니 푸른 달개비(닭의장풀)꽃이 풀섶에 숨어있었다. 도라지모시대가 보라색 ‘작은 종꽃’을 주르륵 매달았다. 계란 모양의 노란 짚신나물꽃은 도대체 이곳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설마 사람들 신발(짚신)에 씨앗이 들러붙어 온 것은 아니겠지.
곰배령 풀꽃이 변하고 있다. 여름꽃 개화기간이 열흘 정도 길어졌다. 대부분 8월 하순이면 지던 것이, 9월 초순까지 핀다. 풀꽃 면적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참나무 숲이 누에가 뽕잎 먹듯 가장자리를 슬금슬금 뒤덮어오고 있다.
곰배령은 ‘퉁퉁한 곰이 배를 벌렁 뒤집고 누워있는 모습’의 둔덕이다. 아슴아슴 안개에 젖어있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안개 낀 날이 줄고 있다. 습기를 좋아하는 흰진범 같은 꽃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직사광선을 싫어하는 도라지모시대도 마찬가지. 꽃만 피우고 씨앗을 맺지 못하는 풀꽃들이 늘고 있다.
질경이도 최근 1, 2년 새 우후죽순처럼 돋아났다. 탐방객들의 발길에 질경이 씨앗이 묻어온 탓이다. 질경이는 둥근이질풀만큼이나 끈질기다. 소달구지나 경운기 바퀴가 훑고 지나가도 다시 살아난다. 머지않아 곰배령엔 둥근이질풀과 질경이 천지가 될지도 모른다. 곰배령전문가 이병천 박사(60·전 국립수목원 연구관)는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른다.
“곰배령의 나무 데크 탐방로부터 당장 뜯어내야 한다. 데크가 바람 길을 막고 있다. 곰배령은 바람골이다. 낮엔 인제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밤에는 동해안 쪽에서 바람이 분다. 바람길이 막히는 것은 앉은뱅이 풀꽃들에겐 치명적이다. 하루 200명으로 제한되는 탐방객 규모라면 조붓한 자드락길로도 충분하다. 점봉산유전자원보호구역 안에 있는 강선마을 주민들도 언젠간 보호구역 밖으로 옮겨가야 한다. 해발 800m의 마을은 점봉산 골짜기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자궁’ 같은 곳인데 펜션에 음식점까지 들어섰다. 골짜기 벌레 먹은 물봉선 이파리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다 사람 탓이다. 산림청과 주민들이 서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새봄 곰배령 풀밭은 온통 놀란 흙들로 울뚝불뚝하다. 멧돼지들이 휘뚜루마뚜루 들쑤셔놓기 때문이다. 멧돼지는 독초뿌리를 캐먹으며 몸 안의 기생충을 밖으로 내보낸다. 덤으로 벌레까지 잡아먹으며 단백질 보충도 한다. 풀꽃들은 이런 멧돼지들이 고맙다. 해마다 흙을 일구어줘 땅이 숨쉬도록 한다. 그뿐인가. 멧돼지들은 배설물 거름까지 주고 간다.
그렇다. 문제는 늘 인간이다. 사람은 질경이보다 백배 천배 더 질기다. 독초보다 더 지독하다. 두 발 인간의 발길이 네 발 짐승보다 훨씬 더 모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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