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국영수와 예체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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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적엔 ‘국영수’로 먹고살았지만, 요즈음은 예체능으로 삽니다.”

‘국영수’로 장관까지 지냈지만 여생은 예체능으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분이 계시다. 한번은 모임에 갔다가 우연히 그분이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하모니카를 부는 모습을 보았는데, 수준급 연주여서 깜짝 놀랐다. 은퇴 후에 익힌 솜씨라고 했다. 신문사 기자, 관료로 바쁘게 살다가 은퇴하면서부터 아코디언과 그림을 배우고 마라톤을 시작했다고 한다.

국영수가 앞날을 보장하는 유일한 밑천이었던 가난한 시대로부터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우리 사회는 놀랍게 변모했고, 경제수준은 기적에 가깝게 발전했다지만 참 신기하다. 우리 교육은 아직도 여전히 국영수에 매달려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역사를 배우는 국사마저 저 멀리 밀려났지만 국영수의 위력은 요지부동이다.

“선배, 대한민국 아이들은 공부의 신인가 봐. 다들 토익 점수가 장난이 아냐.”

한국의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아들과 함께 귀국한 후배가 혀를 내둘렀다. 아들이 미국에서 중고교를 잘 마쳤으니 영어에서는 자신만만했던 후배는 결국 공부의 귀신들에게 항복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공부의 신들을 길러내는 교육정책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시험도 잘 보고 아는 것도 많은데 중요한 한 가지, 한 인간으로서 정말 원하는 삶이 뭔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치열한 경쟁을 뚫고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에 입사해도 1년 이내에 3분의 1이나 그만둔다는 통계가 나온다. 이는 자신이 원하는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고 직장을 선택했거나 아니면 입사한 후 부딪치는 힘든 상황을 참고 견디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다시 취업의 계절이다. ‘자기소개서’ 좀 읽어봐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들은 ‘공부의 신’이란 표현에 어긋남이 없이 토익 토플 성적은 만점에 근접하고 논술까지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논리 전개에서도 별문제가 없다. 다만, 잘 쓴 자기소개서이긴 하지만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고유성이 없다.

만약 내가 시험관이라면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지, 우리나라의 문화유적 중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무엇인지, 끝까지 부를 수 있는 가곡이 있는지, 암송하는 시 한 편이라도 있는지, 공부 말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할 것이다. 선택의 폭이 좁았던 기성세대는 국영수로 산 다음에야 비로소 예체능을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세대는 얼마든지 국영수와 예체능의 조화가 가능하고 그것이 필수적인 시대이기도 하다.

지금쯤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느라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솔직한 자기소개서를 써보자.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으로 살 것인지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세영 수필가
#국영수#국사#예체능#자기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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