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박정희 대통령의 고민도 깊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1970년 겨울 청와대에 들어가 79년 10·26사태 때까지 사회담당특보와 대변인으로 일한 임방현 씨의 증언(구술 ‘내가 겪은 박정희 정부’ 한국정신문화연구원+2011년 조찬강연)이다.
‘78년 유신헌법에 의해 두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으로부터 당선통지서를 받아든 박 대통령은 독백처럼 ‘혼자 나가서(출마해서) 1등하니까 쑥스럽구먼’ 하시더니 방 모퉁이 테이블로 모두 앉게 했다. 그러면서 “80년대에 들어가면 바로 개헌을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대통령의 말은) “첫째, 유신 정우회를 3분의 2 이하로 축소하겠다. 직능대표인데 원내 안정 세력 운운하니까 대폭 감축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대통령 후보는 정당 공천 없이 자연인으로 등록하게 되어 있는데 정당 공천을 하고 등록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겠다. 셋째, 토론 없이 찬반투표만 하게 돼 있는 것도 상호 토론하고 연설할 수 있게 하겠다.” (나는) 이미 (박 대통령도) 유신체제가 갖고 있었던 민주 원칙상의 한계를 자인하고 있구나 여겨졌다.’
임 전 대변인은 “단순히 툭 나온 말이 아니라 흉중에 깊이 들어 있던 생각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 밖에도 대통령은 말년에 혼잣말처럼 ‘6·3사태 때 어떻게 그걸 이겨냈는지 모르겠어. 지금 같으면 못할 거야’ 하던 적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그래, 강하면 부러지는 거지’ 말씀도 하셨다. ‘은퇴하면 가끔 새마을 강연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좋겠어’ 소회를 피력한 적도 있었다”고 전한다.
10·26 현장에서 총상까지 입었으나 살아난 박상범 당시 경호실 수행계장도 2011년 10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비슷한 증언을 했다. 10·26 한 해 전인 1978년 3월 박 대통령이 경북도 순시를 하고 구미 관광호텔에 하루 묵은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여느 날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을 나가셨어요. 그날은 ‘박 군만 오라’ 하셔서 저만 따라 나갔습니다.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앉으라’ 하시고는 ‘집은 샀느냐’ ‘가족들은 건강하냐’ 물으셨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집권이) 18년 됐지? 지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 20년 되는 해에 전격 하야하고 떠나야겠다. 어때? 그러는 게 좋겠지?’ 하시는 거예요. 생각난 김에 툭 던진 말이 아니라는 게 표정에서 다 느껴졌습니다.”
79년 1월 대통령 경제담당특별보좌관으로 발령받은 고 남덕우 총리도 “정국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대통령의 의중을 물어본 적이 있는데 대통령이 개헌과 은퇴를 언급해 놀랐다”고 회고록(‘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서 밝히고 있다.
‘특보들은 대통령이 내려주는 각종 정보 보고를 읽는 것이 일과였다. 나는 비로소 정국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생각 끝에…어느 날 특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정국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내가 봐도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법은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어? 헌법을 개정하고 나는 물러날 거야.” 나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만약 박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개헌과 하야에 대한 생각을 과연 실행에 옮겼을까? 매우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건 약간 다른 이야기이지만, 김계원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보면 김 실장이 79년 대통령의 ‘재혼’을 제안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 실장은 ‘변화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던 대통령에게 휴가를 권하고 79년 4월 경남 진해 대통령 별장에 동행한다. 이 자리에서 “영부인께서도 돌아가신 지 상당 세월이 지났고 모시는 저희들도 이제는 각하의 재혼이 논의될 때가 되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국민들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대통령인 나를 국민들이 용인할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더니 불쑥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 실장! 근혜가 시집을 가주었으면 좋겠는데 엄마 대신 나를 돕는다고 절대로 시집은 안 가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어떻게 하오?…집안 친척 중에 혹시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질색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청와대에 들어오는 것조차도 싫어하니 어찌 하오.”
김 실장은 87년 10월호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는 “당시 박 대통령의 (사람) 접촉 범위는 상당히 좁혀져 있었다. 옛날에는 학교 동창 등 부담 없는 사람들과도 자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곤 했던 모양인데 말년에는 주로 차지철 경호실장이 일과 후의 상대역이었다”고 전했다.
문제는 차 실장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차 실장은 (대통령 앞에서) 김 부장에게 “그렇게 정보부가 약해 빠져서 어떡하겠냐”며 노골적으로 빈정댔다. …그의 과도한 세(勢)를 부풀리는 처신은 대통령의 묵인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이상 설혹 내가 심사가 뒤틀리는 상황이 되어도 외면하는 것이 정도(正道)임을 알았다.’
나중에는 정보부장인 김재규조차도 긴급 보고할 일이 있으면 차 실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다시 김 실장의 말이다.
‘국가 안녕에 직결되는 문제는 언제 어느 때든지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를 드려야 한다.…이러한 엄연한 규정이 있음에도 내가 비서실에 들어간 무렵에는 놀랍게도 김재규가 긴급하게 보고 드리는 일조차도 경호실장 승인이 떨어져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김 부장이 나에게 전화를 직접 걸어와 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차 실장 저 개자식이 내가 각하를 만나 긴급 보고를 드릴 게 있다고 면담 요청을 했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청와대 출입을 지연시키고 있으니 실장님이 저를 좀 불러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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