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이석기와 사보타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0일 03시 00분


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프랑스어 사보타주(sabotage)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노동자의 태업(怠業)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사보타주는 태업과 다르다. 내가 사보타주란 말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는지 알게 된 것은 프랑스 특파원 시절 TV에서 TGV 선로를 누군가 훼손해 열차 탈선의 위험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봤을 때다. 뉴스는 일부 극좌적인 철도 노조원의 반발이 여론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사보타주에까지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사보타주는 시설 파괴행위다. 태업은 프랑스어로 그레브 페를레(gr`eve perl´ee), 영어로 슬로다운(slowdown)이라고 한다.

사보타주를 하기 위해서는 산업의 구조나 설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보타주는 애초 노동자들의 저항 수단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사보타주 같은 과격한 수단은 일상적 노동쟁의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노동운동이 혁명의 성격을 띠고 군사적으로 전화(轉化)할 때 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도 해방 정국에서 이런 사보타주가 종종 있었다. 남로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사보타주였다. 6·25전쟁이 끝난 뒤 남로당 세력이 사라지고 사보타주란 말도 언론에서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국가시설 파괴를 모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떠오른 말이 사보타주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 의원 측 지하조직이 파괴 목표로 삼았다는 통신시설 중에 KT 혜화지사가 포함돼 있다. KT 혜화지사가 서울 곳곳에 있는 다른 KT 지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통신 소비자들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나도 처음 알았지만 KT 혜화지사는 인터넷이 해외로 연결되는 관문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이곳이 타격을 입으면 원활한 인터넷 이용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 의원 측 지하조직은 또 경기 평택물류기지도 파괴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가 석유와 가스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들어오는지는 잘 모르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평택물류기지는 수도권에 석유와 가스를 공급하는 주요 물류기지라고 한다.

철도에 대한 사보타주는 사보타주의 전형과 같은 것이어서 누구나 금방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철도의 어느 지점을 타격할 것인지는 그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KT 혜화지사와 평택물류기지는 통신과 물류 산업을 잘 알지 못하면 특정하기 어려운 곳이다.

사보타주는 테러와 다르다. 사보타주의 1차적 목표는 인명 손상이 아니라 시설 파괴다. 시설 파괴 과정에서 인명이 손상되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설 파괴를 통해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다. 유럽 국가에서 사보타주는 허무주의적인 극좌파 노동운동가나 철없는 환경원리주의자들이나 저지르는 짓으로 여겨진다. 사보타주를 위한 사보타주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적성국인 북한과 대치하는 나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북한은 지금 당장 전쟁을 일으킬 처지나 상황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전시를 위한 작전계획은 갖고 있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한다. 그 주변 계획에는 남한에서의 사보타주 계획도 들어 있을 것이다. 사보타주 계획도 당장 실행에 옮기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상황 변화에 맞춰 계속 고쳐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북한을 위해 그런 작업을 남한에서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나로서는 국정원의 이 의원 측에 대한 혐의가 이 의원 주장대로 국정원의 상상력에 의한 날조인지 어떤지 현재로선 판단할 능력이나 정보가 없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국회의 정보력을 이용해 국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혼란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목표를 골라낸 후 그 목표들을 파괴할 실행 계획을 짠다는 것은 그것이 설혹 상상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어느 때보다 깊숙이 여러 산업 부문과 국가기관에 침투해 있는 지금, 우리가 잊고 있었던 위험을 환기시켜 줬다고나 할까.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이석기#사보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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