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원 비서실장은 1979년 10월 26일 오후 공식 일정을 모두 마친 대통령이 1층 집무실에서 2층 사저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최영희 장군(당시 유정회 국회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다. 최 장군이 “저녁을 사겠다”고 제안하지만 김 실장은 “각하께서 찾으실지 모르니 오후 4시가 지나야 알겠다”고 말한다. 그때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각하께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신다. 6시까지 궁정동 김재규 부장 안집(안가)으로 오라”는 인터폰이 온다.
김 실장은 15분 전인 5시 45분경 도착했다. 김재규가 현관에서 뛰어나오며 “각하께서 피곤하셔서 그대로 쉬실 줄 알았는데 어인 일입니까?”라고 묻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승화 장군이 참모총장으로 부임한 후 한 번도 식사를 같이하지 못해 다른 행사가 없으려니 생각하고 저녁 초대를 해놓았는데 (차 실장 연락을 받고) 미루기도 미안해서 김(정섭) 차장보(정보부 국내담당)를 불러 같이 식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2002년 작고)은 이 저녁 자리 때문에 훗날 12·12 쿠데타세력으로부터 “시해를 사전에 같이 모의했다”며 체포 구속되어 면직과 함께 예편 당했다(그는 97년 사면복권 된다).
이 대목에서 정 총장의 증언을 들어보자(회고록 ‘대한민국 군인’).
“그날 낮 뉴스에서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부분 계엄이지만 비상계엄 상태라서 대통령이 지방출장을 갈 경우에는 나도 일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차지철은 자기 혼자 모신다는 핑계를 대며 그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뉴스를 접하고 나는 그날 약속되었던 예편한 군 장성 송별연을 무기 연기하라고 부관에게 지시했다. 대통령이 서울을 비운 때에 술자리를 갖는다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퇴근시간 전에 김재규로부터 저녁을 함께하자는 전화가 왔다.”
그가 저녁 약속을 수락한 배경은 이랬다.
“그와 나는 고향이 가까운 사이이고 군에서의 계급도 비슷한 선배라 깊이 있게 사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기)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성향이라서(내가 3군단장으로 갔을 때 전임 군단장이었던 그는 도처에 자기 이름을 넣은 비석을 세워 두었다) 왠지 잘 맞지 않는 느낌이어서 의례적인 선(線) 이상으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하지만) 얼마 전에도 김재규의 초대를 받아 3군 참모총장과 연희동 술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어 (이날도)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러자고 했다.”
정 총장은 김재규가 오라고 한 궁정동 안가로 수행부관과 함께 나선다. 다시 그의 말이다.
“대통령도 안 계신데 술집이 아니라 사무실이라고 하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서울에 오래 살았지만 난 그때까지 궁정동이라는 동네가 있는지도 몰랐다. 도착해 차에서 내리는데 뒤따라 승용차에서 사람이 내리더니 ‘김 부장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아 저녁을 하고 있다’면서 ‘곧 올 터이니 그때까지 대신 접대하겠다’고 했다. (자신을) 국내 담당 차장보 김정섭이라고 소개했다.”
한편 김계원 비서실장은 “이날의 만찬은 대통령을 제외한 참석자 세 사람(김계원, 김재규, 차지철) 모두 사전에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며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부마사태가 터지고 그 지역이 계엄이 내려진 뒤라 정승화 총장도 매우 어려운 시간을 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안가에 도착한 김 실장은 최영희 장군의 모처럼 저녁 초청에 응하지 못한 것을 김재규에게 들려주며 대통령의 돌연한 저녁 행사를 의아해했다. 김재규는 김 실장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정보부 박선호 의전과장을 불러 ‘대행사’의 준비 상황을 물어보며 소홀한 점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행사’라는 것은 소위 ‘연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선호의 10·26 결심공판 최후진술에서 언급된다(책 ‘10·26과 김재규’).
“대통령이 희생된 연회장소라는 것은 오로지 대통령이 여인들과의 유락장소로 이용하던 장소로서…보안에 철저를 기하였기 때문에 비밀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김재규 피고인, 박선호 차지철 등과 남효주 사무관(관리인) 및 몇 사람의 심부름꾼이었다.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오는 빈도는 월 10회 정도이고 상대하는 여자는 주로 TV 탤런트 연극배우 모델 등 연예계에 종사하는 처녀들로서…10·26 그날 밤과 같이 여자 두 사람과 남자 3인 또는 4인이 모이는 행사를 ‘대행사’라 했다.”
한편 김재규는 이날 “차지철의 연락을 받자마자 ‘대통령 시해’를 계획했다”고 항소이유서에 밝힌다.
“오후 4시 30분 남산 집무실에 있는데 차 실장으로부터 만찬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오늘이야말로 대통령을 제거할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해 궁정동에 도착해 권총을 준비한 뒤 그곳 침대에 드러 누워 혁명과업 수행을 생각했다.”
안가에 도착한 김 실장을 앞마당 정원의 평평한 조경석으로 안내한 김재규는 부산과 마산에서의 시위를 화제로 삼아 현장을 지휘한 공수특전부대장 정병주 장군의 부대 운용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김계원 회고록).
“공화당의 실정(失政)과 시국을 강경하게 몰고 가려는 자들 때문에 각하의 판단이 더 흐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차 실장이 문제입니다. 모든 시국의 불안과 사태 악화가 그로부터 기인한 것이 많으며 그가 무서워 당 간부들도 바른 말로 대통령께 진언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장님, 부마사태는 단순히 야당의 선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폭동 진압방식으로 제압을 하면 부산시민 전체가 일어나 봉기할 것입니다.”
김재규의 얼굴은 상기되고 말투는 격했다고 한다. 이어 “실장님! 차지철 저놈 오늘 해치울까요?”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 내게 무조건 불리하게만 말씀을 드리니 각하께서 중정이 올리는 보고를 통 믿으셔야지요.”
대통령이 도착할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김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김 부장, 너무 격하지 말고 나도 생각이 있어. 내일 각하께 보고드리는 자리에서 말씀드릴 것이고, 또 민정수석도 내일 나와 같은 뜻의 보고를 올릴 테니 어디 좀 지켜봅시다.”
훗날 법정에 선 김 실장은 김재규가 “차지철을 해치울까요” 묻는 대목에서 가타부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 시해계획을 알고도 묵인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김재규가 차 실장의 월권에 심한 불만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터에 그의 말을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도 않았고 동의한 것도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김재규가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지 원망스럽다”며 자신에게 씌워진 내란미수 등의 혐의가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김 실장은 10·26 직후인 1979년 10월 29일 구속되어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은 뒤 82년 5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되었으며 88년 사면 복권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