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부형권]책임 대통령 세일즈 총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6일 03시 00분


부형권 정치부 차장
부형권 정치부 차장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제34대)의 부통령이던 시절(1953∼1961년). 닉슨 부부가 시카고의 한 호텔에 묵었을 때의 일화.

한밤중에 화재경보가 울리자 닉슨 부부를 포함해 수백 명의 투숙객이 로비로 대피했다. 잠시 후 닉슨은 경보기 고장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닉슨 부부는 방으로 돌아가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호텔 보안팀장=“잠시만요.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모든 투숙객은 로비에 계셔야 합니다.”

닉슨=“나, 바이스 프레지던트(the vice president)요.”

보안팀장=“아, 죄송합니다. 어서 올라가십시오.”

닉슨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 할 때 뒤따라온 보안팀장이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보안팀장=“그런데 어느 곳의 바이스 프레지던트시죠?”

닉슨=“미합중국의 부통령이라니까.”

보안팀장=(화난 목소리로)“그럼 당장 로비로 돌아가세요. 저는 우리 호텔의 부사장님인 줄 알았잖아요.”

미국 정치 유머집 내용이다. 권력 2인자 부통령의 유명무실한 위상을 풍자했다. ‘설마’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초대 부통령이자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부통령은) 인간의 머리로 고안해낼 수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리”라고 말했다. 21세기 미 정치학자들이 부통령에게 하는 제1의 조언도 “당신은 대통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라.”

한국 행정부의 2인자는 국무총리다. 미국 부통령은 대선 러닝메이트 선출직이지만 한국 총리는 임명직이다. 더 기구할 수 있는 구조다. ‘책임총리제 실현’이 대선 공약의 단골 메뉴인 이유도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책임총리는커녕 소신 있는 장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입술만 바라보는 해바라기형 내각이다.”(박근혜 정부 출범 6개월(8월 25일)에 대한 민주당 논평)

국민 눈에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건 총리와 내각만이 아니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김한길 대표의 노숙투쟁은 박 대통령의 입에서 “만나드리지요”가 나올 때까지 계속될 태세다. 누굴 탓할 일도 아니다. ‘실질적으로 국민 생활에 불편을 미치는 일이라면 그 일의 경중을 따짐이 없이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전가하는 한국적 정치상황’(‘대통령학’·나남출판) 탓이다.

고건 전 총리에게 “책임총리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국무위원 제청이나 해임건의 같은 헌법상 총리 권한을 대통령이 책임지고 존중해주는 총리? 그게 아니라면 대통령 대신 책임이나 지는 총리”라며 웃었다. 촌철살인이다. 대통령이 책임져주지 않는 한 책임총리도 없다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적극적인 세일즈 외교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우리 경제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 기업들을 뒷받침해 나갈 것입니다.” 말리고 싶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그럴 여력이 없어 보여서다. 책임질 일이 너무 많고 ‘책임지라’는 요구도 너무 많다. 혁혁한 세일즈 외교 실적을 거둬도 책임은 하나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일즈 외교를 총리에게 책임지우면 어떨까. 정홍원 총리는 이미 8월 25∼31일 바레인 카타르 스리랑카 터키 등 4개국을 순방하며 세일즈 외교를 벌였다. 방문국의 큰 환대를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어떤 주목도 받지 못했다. 1976년과 1977년 각각 수교한 바레인과 스리랑카는 한국 총리급 이상의 첫 공식방문이었다. 무역과 외교로 먹고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대통령이 모든 걸 책임지고 총리는 ‘대통령의 잘못’만 책임지는 고질적 구조 탓일 수 있다.

행정 각부를 ‘유명무실하게’ 총괄하는 총리의 기능을 세일즈 외교로 집중해보면 어떨까. 혹시 아는가. 이 엉뚱한 시도에서 박근혜식 ‘창조 정치’의 씨앗이 싹틀지….

부형권 정치부 차장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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