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총선을 4개월 앞둔 2011년 12월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두 갈래의 큰 통합이 이뤄진다. 하나는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유시민이 이끄는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탈당파(새진보통합연대)가 뭉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당을 중심으로 친노무현 세력(시민통합당)과 한국노총이 뭉친 것이다. 전자는 통합진보당, 후자는 민주통합당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두 당은 총선을 앞두고 선거연대를 맺는다. 진보좌파 진영의 땅에 두 개의 빌딩을 세우고, 서로를 잇는 구름다리까지 만든 것이다. 우연인지, 누군가가 의도한 작품인지는 몰라도 야권 전체를 아우른 정교한 ‘정치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4월 총선이 끝나고 얼마 안 돼 터진 통진당의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태로 두 개의 빌딩 중 한 개는 무너져 내리고 구름다리도 사실상 끊겼다. 통진당은 국민참여당계와 진보신당계가 떨어져나가고 이전의 민노당계만 남았다. 그때와 지금의 통진당은 이름만 같을 뿐 실체는 다르다. 대선을 앞두고 빅텐트니 뭐니 하며 민주당과 통진당을 합치거나 연대를 강화하려던 대통합 논의도 쏙 들어갔다. 대선 판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부정경선 사태는 통진당 일각의 종북성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런 일 자체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노출되지 않았다면 통진당 비례대표 후보로 누가 이름을 올렸는지, 이석기(구속 수감)와 김재연이 누구인지, 이들의 정치적 모태나 다름없는 경기동부연합이 무엇인지 국민은 깜깜절벽이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이석기 김재연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국회를 활보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의 내란음모 사건도 쉽게 적발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석기가 의원직에서 제명될 경우 승계할 강종헌이 간첩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감형돼 13년간 복역한 적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도 당시엔 알려지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고 보면 통진당의 부정경선 사태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부정경선 사태 당시 다른 비례대표 후보들과 달리 이석기 김재연 두 사람은 끝까지 사퇴하지 않고 버텼다. 진보좌파 진영의 P 씨는 두 사람이 북한과 연계돼 국회 진입의 특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S 씨는 의원직에 딸린 각종 혜택을 포기하기 어려운 생계형 운동권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등 숱한 추측이 나돌았다. 진짜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 듯하다. 국가정보원 수사에 따르면 이석기는 자신의 지하조직원들에게 국회를 ‘혁명의 교두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 신분을 쟁취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말한 북한과의 연계나 특명 여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다.
이석기에 대한 다른 궁금증이 하나 더 있다. 그는 2003년 3월 민혁당 사건으로 항소심에서 징역을 선고받고도 불과 5개월 뒤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 특사 대상자 15만여 명 중 공안사범은 이석기가 유일했다. 2년 뒤 그는 다시 광복절 특사로 복권됐다. 아무리 북한에 너그러웠던 정권이라 해도 “김일성은 민족을 자주독립 국가건설로 이끈 절세의 애국자”라고 말하는 골수 종북주의자를 그렇게 쉽게 풀어주고 복권시켜줄 수가 있는 일인가.
두 번의 특사 모두 당시 문재인 대통령민정수석이 관여했고, 집행은 강금실 법무장관(2003년)과 천정배 법무장관(2005년)이 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당시 사면에 대해 “다양성 측면에서 사회 한쪽 구석에 존재해도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당시엔 누구도 이석기가 훗날 더 엄청난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책임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다만 특사에 직접 관여한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진솔한 이유를 듣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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