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한국사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된다는 소식이 있다. 학생들의 학업부담을 늘리고 다른 과목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등 반대론이 있었으나 청소년 절반이 6·25전쟁 발발 연도도 모른다는 설문조사가 나오는 등 부실한 역사의식에 대한 우려가 계속된 데 따른 결과다.
하지만 한국사 수능 필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대학에서 경제사를 전공하고 교과서 포럼과 대안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바 있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62)는 3일 서울대 경제연구소에서 만난 자리에서 “입시제도만 바꾸면, 학생들에게 역사 공부할 시간만 따로 내주면 역사 교육이 바로잡힐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라고 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당초 그는 ‘수능 필수 지정’에 반대론을 폈다.
역사교육 권리-책임은 학계 아닌 정부
“결국 대통령 한마디(6월 1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교육현장에서 진실을 왜곡하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 대목)에 두 달 만에 제도를 고친 셈이 됐다. 하지만 적어도 향후 2년에 걸쳐 공론의 장을 이어가면서 청소년들에게 어떤 역사를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뤄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역사 교육을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사 교육의 주체는 정부다. 사학계는 보조세력이다. 한국사 연구자들의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부정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교육의 권리와 책임은 국가가 지고 있다는 말이다.”
“현재 교육현장에서 이뤄지는 역사 교육의 문제는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는 “무엇보다 대한민국 건국 역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쓰이고 가르쳐진 건국의 역사는 이 나라가 세워지고 발전해온 과정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제 통합의 역사를 새롭게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거의 진공상태나 다름없는 현대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2003년부터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일선 학교에서 쓰이긴 했지만 2011년 교과과정이 대폭 개편되면서 ‘한국사’로 묶여 현대사 교육시간은 대폭 줄었다.
“현재 중고교 역사과정에서 대한민국 건국 후 역사 교육은 비중이 대단히 작다. 게다가 내용의 문제점은 더 심각하다. 그간의 역사 교과서는 자랑스러운 우리 현대사를 간과해왔다. 기존 교과서를 통해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전달된 근현대사의 시각은 ‘민족’이 우선이었다. 이순신, 태극기, 무궁화, 유관순…. 그러고 나서는 ‘어른을 공경하고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등의 시민예절 교육을 하고,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가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통일교육을 하는 식이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쓰였다. 민족주의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너무 민족주의만 강조하다 보니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풍부한 역사 서술이 없었다. 이 나라의 기초이념이 무엇인지, 왜 그것이 정정당당한 것인지,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정치세력이 국가를 세웠는지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 교육이 안돼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역사의식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는 6·25전쟁을 예로 들었다. “현행 역사 교과서 어느 하나도 6·25전쟁이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 침입에 맞서 대한민국이 우방 미국의 도움을 받아 인권과 자유를 방위한 전쟁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다. 6·25전쟁은 동족상잔의 슬픈 전쟁이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반공독재가 강화되었다고만 쓰여 있다…민족이라는 공동체의식은 감성의 영역이다. 민족주의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관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이다. 이 둘은 서로 보조를 맞추면서 함께 나아가야 한다.”
국민 통합하는 역사 쓰고 가르쳐야
그의 말이 이어졌다.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이념은 자유민주주의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고, 따라서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런데 지금껏 이에 대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출발과 방향, 많은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고 많은 비용을 지불했지만 그럼으로써 이룬 성취에 대한 국가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국인은 대단히 우수한 민족이다. 지적 수준, 근로 능력 등이 대단히 높기 때문에 이렇게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인들을 하나의 정치적 질서로 통합하는 문화나 역사의식이 상당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 대목에서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한국 정치가들에게 대단히 큰 책임이 있다”고 했다.
“나는 집권당인 새누리당이나 야당인 민주당, 한국의 정치적 통합을 책임질 정치세력 가운데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생각한다. 한 나라의 역사를 두고 국민을 통합할 수 없는 틀로 교육하면 당연히 국민들은 정신적으로 분열하고 대립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분열과 대립은 거기서 비롯된다. 새누리당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라. 정당의 역사를 쓰고 있는데 불과 10년 전 한나라당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의 정당,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이런 정당들과 어떤 관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할 용기나 틀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건국 당시부터 시작된 야당의 역사와 오늘날의 야당은 어떤 관계인지, 한국의 두 정치세력이 한국의 정치사 속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에 대한 자기인식이 없다.”
美의회 역사 분열시키는 새 교과서 거부
그러면서 미국의 역사 교육 경험을 소개했다.
“미국에서도 1990년대에 역사 교과서를 새로 만들면서 논쟁이 일었다. 일부 학자들이 새 교과서에 워싱턴과 제퍼슨 등 건국 영웅들의 업적을 줄이고 인디언 학살과 흑인노예를 강조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관철되지 않았다. 새 교과서 반대 결의안이 상원 의회에서 99 대 1로 통과됐기 때문이었다. 새 교과서가 미국의 정통적 역사에 중대한 분열을 부르고 국민 통합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여야 정치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당시 미국 정치인들은 새 교과서가 제시한 시각은 대학에서 논문으로 쓸 수도 있고, 뉴스로는 보도될 수 있지만 초중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공교육에서만큼은 미국의 자랑스러운 정통 역사를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다시피 미국은 자유를 국가 통합의 지상 최고 이념으로 중시하는 나라다. 그런 미국에서 1990년대 벌어진 역사 교과서 논쟁은 역사 교육을 책임지는 주체가 국가이고 정치 엘리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그는 “역사란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라고 했다.
“우리가 2013년 9월 이 자리에 있는 이유, 그걸 아는 것이 바로 역사다. 모든 사람은 자기 기억의 축적 위에서 존재한다. 나라도, 민족도 마찬가지다. 그 나라와 민족을 있게끔 하는 역사적 기억이 있고, 그 역사적 기억이 현실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래서 역사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현재의 틀에 과거 끼워 맞춰선 안돼
이 교수는 최근 ‘대한민국 역사: 나라 만들기 발자취 1945∼1987’(기파랑)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광복과 건국에서 출발해 1987년 민주화시대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이 걸어온 역사를 정리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를 ‘나라 만들기’라는 목적을 두고 걸어온 여정으로 보았다”고 했다.
“‘나라 만들기’의 핵심 요건은 첫째, 국가의 기초이념을 확실히 하며 둘째, 정부 형태를 확정해서 정치체제를 안정시켜야 하고 셋째, 경제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과제가 어느 정도 달성된 다음에 민주주의 정치가 성립하게 되는데, 이 요건들이 충족된 것을 1987년으로 봤다. ‘나라 만들기’가 완전히 성취됐다고 하긴 어렵지만 얼추 마무리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에 걸맞은 역사를 쓰지 못했다는 것, 오히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교육이 빠진 채 학교 현장에서 역사 교육이 이뤄졌다는 것, 그런 면에서는 ‘불완전한’ 마무리다. 이 나라가 보다 높은 수준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역사를 쓰는 작업이다. 대한민국 건국의 이념에 입각해서 정당하게 지난 68년간의 역사를 재평가하는 작업 말이다.”
그는 “역사를 현재의 잣대가 아닌 과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이에 대한 공과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우리는 저마다 틀을 맞춰놓고 과거를 끼워 맞추려 했다”며 “어떻든 한국사 수능 필수를 기점으로 삼아 제대로 된 교과서를 만들어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청소년 세대에게 불어넣어야 할 의무가 어른들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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