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고향 가는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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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한 주일 사이에 여름에서 가을로 확 바뀌어버렸다. 맑은 가을날 도심에만 있기가 아까워서 강원 철원에 있는 승리전망대로 향했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몇몇 사람이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표에 맞추어 안내원과 함께 승리전망대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두 딸과 함께 온 노부부가 있었다.

“그동안 왜 진작 이곳에 와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네요.”

올해 여든이라는 실향민 할아버지는 저 앞에 보이는 산과 들을 지나 남쪽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전쟁이 나자 두 살 위였던 형은 바로 인민군으로 징집되었고, 자신은 인민군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부모형제와 이별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열일곱 살 소년. 그러나 자신도 곧 남쪽에서 국군이 되었으니 혹시 어느 전선에서 형과 총부리를 겨누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한 맺힌 그 길을 보기 위하여 63년 만에 철원에 왔다는 실향민 할아버지. 승리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비무장지대는 투명한 가을 햇빛을 받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데, 멀리 북쪽 비무장지대의 논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군 초소의 병사들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금방 손에 잡힐 듯한 북녘 땅이 그리운지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고 발돋움을 했다.

“실향민 중에서는 젊은 축에 속해서 그런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해도 매번 떨어져요. 부모님은 벌써 돌아가셨겠지만 형님이랑 여동생들이 살아 있을 텐데….”

짧은 관람시간이 아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할아버지와 헤어져 오는 길이 착잡했다. 다음 주에는 추석 귀성행렬이 줄을 이을 텐데 실향민들은 고향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울까. 아무리 지옥 같은 교통체증이라도 그들에겐 더없이 부럽고 호사스러운 길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고향, 언제라도 달려가 만날 수 있는 부모형제를 두고도 무심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큰 기쁨 하나를 놓치고 살았던 셈이다.

“아직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이번에도 이산가족 상봉에서 떨어졌나 봐”라고 힘없이 말하던 실향민 할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명절날 고향 가는 길의 교통대란이 북녘 땅으로도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을 그려본다.

윤세영 수필가
#승리전망대#이산가족 상봉#북한#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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