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급 관리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는 오페라 공연을 보는 중 갑자기 재채기를 하여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침이 튀게 하고 만다. 황급히 그는 그 자리에서 사과를 하고 장군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군에게 결례를 범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 지속되어 공연에 집중하지 못하고, 공연 휴식 시간에도 또 공연이 끝난 후에도 장군을 찾아가 용서를 구한다. 반복되는 사과에 장군은 다소 짜증을 내고, 체르뱌코프는 장군의 눈빛에 원한이 담겨 있다 해석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불안해한다. 그는 결국 다음 날 장군의 접견실에까지 찾아가 사과를 한다.
이 과정에서 체르뱌코프는 장군이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 크게 불쾌하게 여긴다 생각하며, 다음 날도 다시 장군을 찾아 절박하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사과에 짜증이 난 장군은 마침내 그를 거칠게 쫓아낸다. 크게 놀란 체르뱌코프는 흐느적흐느적 밖으로 걸어 나가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기며 집에 돌아와서는, 관복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웠고 ‘그리고…죽었다.’
이 갑작스러운 결말의 이야기에서 체르뱌코프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장군이 아니라 체르뱌코프 자신일 것이다. 자신의 실수, 결점을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자신을 학대하거나 거부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자아 수용(self-acceptance)’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중심적인 자기애(narcissism)와는 다르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과도 다르다. 자신의 실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잘못을 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신의학회의 우울증 진단 기준 중 하나로 ‘과도하거나 부적절한 죄책감’이 있는데, 이는 체르뱌코프의 경우에서처럼 적절한 자아 수용에 실패하여 자신의 과오를 반복적으로 곱씹으며 자책하는 상태이다.
때때로 중년의 남성 우울증 환자들에게서 이러한 자아 수용의 부재와 이에 따르는 심한 자책감을 보게 된다. 수년 전 진료실에서 만난 중년 남성은 사업을 하다 주변의 권유로 부동산 투자를 했으나 실패하여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보았다고 했다. 이후 노력하여 어느 정도 회복은 했지만, 당시 자신이 잘못 결정한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으로 잠을 못 자고 식욕이 떨어지고 삶의 흥미를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가족들을 고생시켰다는 자책감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결국 진료실에 오게 되었다.
가족들이 아무리 달래고 괜찮다고 하여도 그 중년 남성은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끼며 종종 죽음까지 생각하였던 것이다.
위 중년 남성의 경우처럼, ‘남 탓’ 할 줄 모르고 문제가 생기면 ‘내 탓’이라고 여기며 죄책감의 무게에 눌려 지내는 사람들은 자신의 괴로움을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착한 사람,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사람들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자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과도한 책임감으로 인해 자신이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여 혼자서 전전긍긍하는 것을 가족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을 바뀌게 하여 이들이 자신의 결점과 실수를 용납하고 지나친 자기 비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나친 죄책감과 우울증의 관계는 이미 프로이트의 시대에도 제시된 바 있다. 프로이트는 통상적인 슬픔과 우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과도한 죄책감과 자기 비난을 든 바 있는데, 이러한 죄책감과 우울증의 관계는 현대의 여러 과학 연구를 통해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2012년 영국의 맨체스터대 연구진이 발표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에 따르면, 우울증을 이전에 앓았던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은 적이 없는 사람들에 비하여 죄책감과 연관된 뇌 부위와 적절한 행동을 지시하는 뇌 부위들 간의 기능적 연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우울증에 취약성을 보이는 사람들의 경우, 자신에 대한 비난의 감정을 느낄 때 이에 대처하는 뇌 부위가 통합적으로 동조화(coupling)되어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뭐 그런 일 가지고 그래?”라며 주변에서 아무리 격려해도 쉽게 자기 비난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칫 과도한 자책감이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 관련 연구의 전문가인 토머스 조이너는 사람들이 자살에 이르게 되는 세 가지 조건으로 낮은 소속감(low belonging),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fearlessness), 그리고 남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burdensomeness)을 든다. 이 세 가지 조건 중 ‘남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은 자책감 및 자기 비난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자신이 다른 이들을 실망시키거나 도움을 주지는 못한 채 짐만 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자책감에 빠져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잃고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게 되어 자살이라는 선택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실수한 자신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 건강에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비하를 하지도 않고,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 자기중심적 자기애에 빠지지도 않은 채 적절한 자아 수용에 이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장기 가정에서의 경험을 성인기 자아 수용의 정도와 연관이 있는 요소로 꼽고 있다. 어린 시절 받은 학대, 부모의 이혼, 부모가 얼마나 아이에게 따뜻하게 대하고 민주적으로 대하느냐 등이 아이가 컸을 때의 자아 수용의 정도와 연관성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아이가 가정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받기보다는 완벽한 모습만을 요구받은 경우,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를 포용하지 못하고 거부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자신이 어떠한 실수나 잘못을 하더라도 자신을 그 자체로 받아들여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용납하고 포용하는 것은, 그 사람 또한 자신을 용납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돕는 숭고한 행위인 것이다. 우울증과 자살이 만연한 이 시대에 우리는 남 탓, 내 탓에 앞서 타인을 사랑하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되짚어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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