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절벽(glass cliff)’이라는 말이 있다. 2005년 영국 엑스터대의 미셸 라이언 및 앨릭스 해즐럼 교수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유리절벽은 기업들이 실패 가능성 높은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여성을 승진시킨 뒤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물어 해고하는 현상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불안정하고 실패의 위험이 높아 남성들이 꺼리는 자리를 여성이 차지할 가능성이 높으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았음에도 능력이 없어 실패했다”는 구실로 여성을 희생양 삼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일대의 빅토리아 브레스콜 교수팀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보았다. 실험은 다음과 같은 의구심에서 시작됐다.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성의 실수는 비록 작은 것이라도 같은 지위의 남성에 비해 더욱 가혹한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
실험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이성적 판단이 필요한 직업의 책임자(여자 경찰서장과 여자대학의 남성 학장)가 위기 대응에 성공하거나 실패한다는 시나리오였다. 연구팀은 책임자가 업무를 잘 수행했을 때와 실수를 했을 때의 시나리오를 비교해 주고 실험 참가자들의 평가를 조사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실험 참가자들은 실수가 없을 경우에는 남자나 여자 상관없이 비슷하게 평가를 내렸지만, 실수를 했을 때에는 여성에 대해 훨씬 냉정한 반응을 드러냈다. 승승장구하던 알파걸이 작은 실수에도 책임을 추궁당하고 유리절벽에서 미끄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공한 여성에 대한 반응은 평소에도 이중적이다. ‘잘한다’는 긍정적 평가의 뒤에는 ‘기만적이다’ ‘미덥지 못하다’ ‘결단력 없다’ ‘매섭다’ ‘싸움닭이다’ 같은 뒷담화가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알파걸에게 유리절벽은 ‘성공에서 삽시간에 미끄러지는 절벽’만의 의미가 아니다. ‘미끄러워서 오르기 힘든 절벽’이란 의미도 찾아낼 수 있다.
학교에서 승승장구했던 알파걸이 처음으로 만나는 유리절벽은 취업이다. 취업 유리절벽에 매달리는 데 성공, 익숙해질 만하면 결혼이라는 선택의 기로가 닥쳐온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절벽을 거친 후 30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6%로 크게 떨어진다. 물론 이 같은 불리한 여건을 무릅쓰고 유리절벽을 오르는 알파걸의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성공한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 비해 여전히 불안한 경향이 있다. 작은 실수 하나조차 예사롭게 넘겨버리지 못하는 여성 리더들의 ‘결벽성 완전주의’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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