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부임 3년 맞은 피터 뤼스홀트 한센 주한 덴마크대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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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의 두가지 길, 많이 내고 많이 받을지
적게 내고 적게 받을지 한국인들이 선택할 시점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주한 덴마크대사관에서 만난 피터 뤼스홀트 한센 대사. 그는 “한국은 사회 발전의 속도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만큼 미래의 모습도 궁금하다”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주한 덴마크대사관에서 만난 피터 뤼스홀트 한센 대사. 그는 “한국은 사회 발전의 속도가 그 어느 나라보다 빠른 만큼 미래의 모습도 궁금하다”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6일 박근혜 정부는 모든 노인에게 20만 원씩 지급하겠다고 했던 ‘기초연금’ 대선 공약을 원안대로 지킬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이에 따라 노인들 중 약 60%만 혜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연금 대상과 금액이 확대됐다는 점에서 우리 복지는 분명 나아지고 있지만 실망의 목소리도 크다. 언제까지 빚을 내 복지 정책을 해야 하는 건지, 대선 때 약속했던 다른 복지정책들은 어떻게 되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덴마크 복지 특징은 ‘유연 안전성’

“어르신들께 죄송하다”는 대통령의 사과가 나온 날인 26일 피터 뤼스홀트 한센 주한 덴마크대사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복지의 이상향’으로 생각되는 덴마크의 상황은 우리와는 너무 달라 보여서다. 최근 유엔이 발표한 ‘2013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덴마크는 10점 만점에 7.693점을 받아 조사 대상 156개국 가운데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실제로 덴마크는 ‘복지 천국’이나 다름없다. 65세가 넘으면 과거 평균소득의 절반 정도를 연금으로 받고 유치원부터 대학 교육이 무상이며 의료도 거의 공짜다. 부임 3년째를 맞는 한센 대사에게 “덴마크 복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라는 말이 돌아왔다. ‘유연안전성’이라는 뜻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기업 관점에선 ‘유연’하고 노동자 관점에선 ‘안전하다’는 말을 합친 것이다. 덴마크 기업들은 해고가 자유롭다. 대사직을 맡고 있는 나 역시 내일 당장 해고될 수 있다. 기업들은 이런 해고 자유를 대가로 과도한 인건비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이를 높은 복지비용(세금)으로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해도 안전하다. 해고가 되더라도 직전 연봉의 90%를 정부에서 대준다. 아이들을 그대로 학교에 보낼 수 있고 당장 먹을 것을 살 수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실업이라는 위기가 닥쳤어도 벼랑 끝으로 추락하지 않는 것이다.”

덴마크 노동시장의 절반이 현재 한국에서 실시하려 하는 ‘시간제 선택제’라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었다. 한센 대사의 말이다.

“덴마크 노동자들 중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까지 ‘나인 투 파이브’로 근무하는 형태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직장 내 인사 담당자나 상급자와 상의해 하루 총 노동시간 7시간 30분을 채우면 되고, 주말에는 근무를 안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니 육아 부담도 부모가 함께 질 수 있다.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오후 4시에 끝나면 부모 중 한 명이 데리러 간다. 부모 중 하나가 아이들을 씻기고 먹을 것을 먹이고 난 뒤 집에서 1, 2시간 동안 남은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 중 한 명이 이틀간 휴가를 낼 수 있다. 물론 이런 근무형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긴 한다. 중국, 한국 같은 국가들을 국제적으로 이겨낼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를 일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집중하느냐, 즉 노동시간의 총량이 아니라 효율성이다. 근무시간이 유연하다고 해서 절대 편하게 일하지 않는다. 근무시간에 딴짓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집중적으로 시간 내에 끝낸다.”

100년 넘는 갈등-타협의 산물

사실 기자가 궁금했던 것은 덴마크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였다. 지금의 ‘복지 천국’은 어떻게 가능하게 됐을까.

기자가 “덴마크도 과거에 파업과 공장폐쇄 등 노사 갈등이 심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15년 전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를 파트너로 인정하는 ‘9월 협약’을 이끌어 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결정적이었나” 물으니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내저으면서 ‘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덴마크를 만든 ‘결정적 사건’은 없었다. (팔을 들더니 손으로 약간 올라가는 추세의 선을 만들면서) 덴마크 복지 역시 무려 100여 년에 걸친 치열한 논쟁과 갈등의 산물이다. 덴마크에는 18세기부터 사회주의자들의 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급여를 계속 올려달라고 요구해왔다. 20년 동안 그런 요구가 쌓여왔다. 1905년부터는 소작농, 노동자들의 정치적 파워가 커져갔다. 원래부터 권력이 있었던 땅 부자나 공장 소유자들 이외에 파이를 나누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는 최초로 사회당에서 총리가 선출되었다. 이때 노동조건에 대해, 월급에 대해 본격적 논의가 시작됐다. ‘건강보험’ ‘노인연금’ 등이 모두 논의됐다. 그러면서 복지라는 것은 소수의 빈곤층뿐 아니라 국민 모두의 권리라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아버지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모두가 기본적 복지혜택을 공급받는 것이 결국은 더 큰 사회적 자산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 덴마크의 기업과 노동자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한다. 파업이나 극단적 대립도 드물다. 하지만 이런 결실을 거두기까지 매우 ‘긴, 긴,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매우(very)’와 ‘긴(long)’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며 강조했다. 그러면서 “덴마크의 지난 역사를 보면 한 정당이 많은 권력을 누린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좌파, 중도파가 정권을 잡기도 하고 어떤 때는 보수 정당이 권력을 잡았다. 여러 정당이 연합을 한 적도 많았다. 여러 정당이 함께 일을 했기 때문에 ‘타협’이 발전했다고 본다. 한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덴마크가 한국의 답은 아닐 것이다. 이제 한국도 한국인들이 원하는 미래에 대해 ‘뜨겁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감히 생각한다. 지금 덴마크는 피상적 차이점은 있지만 모든 정당이 복지가 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서로 합의가 된 상태다. 즉, 전 연령대에서 고령층이 먼저 복지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점, 아이들이 먼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도 미래를 ‘뜨겁게’ 이야기할 때

―덴마크 국민의 세금 부담은 높다. 우리도 지금 증세 논쟁이 불붙고 있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우선 덴마크인들은 세금을 많이 내는 것에 불만이 없나.

“우리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붙인다(웃음). 붙일 수 있는 건 다 붙인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높은 세금 없이 ‘의료도 공짜, 교육도 공짜, 연금은 모두에게’라는 시스템은 불가능하다. 덴마크의 경우 소득세가 45∼50%(우리는 소득구간별로 6∼38%), 부가가치세는 25%(우리는 10%) 정도 된다. 자동차를 만들지 않는 덴마크는 차를 모두 수입하는데 차에 붙는 세금이 무려 250%다. 원가 3000만 원짜리 차에 250%(7500만 원) 세금을 붙여 1억500만 원에 사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형차가 인기를 끄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높은 세금도 어느 한순간에 팍 올린 것이 아니라 100년 동안 꾸준히 올렸다. 지금은 더이상은 올릴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도출된 상태다. 앞으로 현재 수준보다 더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높은 세금을 부담하는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에 대한 신뢰다. 내가 내는 세금이 새지 않고 결국 나를 위해 쓰일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말이다. 2012년 국제투명성기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덴마크는 국가 청렴지수가 100점 만점에 90점이었다.”

한센 대사는 자신의 예를 들었다.

“나의 경우 지난해 연말정산을 올 3월에 했는데, 연말정산 때가 되면 모든 근로소득자는 국세청에서 서류 한 장을 받는다. 모든 은행 기관들이 서로 공유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세금산출 명세다. 납세자는 따로 증빙서류를 낼 필요가 없이 이 서류가 맞는지 체크만 하면 된다. 매년 10월에는 내년에 낼 소득 예상 견적서를 받는다. 납세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국세청이 확인에 들어간다. 정부기관 간 자료 공유율이 높고 정보 수집률이 좋기 때문에 탈세 여부를 국민들이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또 국세청 업무의 대부분은 일반인보다는 기업의 탈세에 더 초점을 둔다.”

그가 지난 3년 동안 느낀 한국사회는 어떨까. 그는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세계 1등이 되고 싶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하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원동력”이라고 전제한 뒤 “ 거듭 말하지만 덴마크의 길을 한국이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도 한국의 길을… 서두르지 말라

“복지의 형태는 나라별로 다르고 무엇보다 국민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처럼 (세금을) 많이 내고 (복지 혜택을) 많이 돌려받을지, 아니면 적게 내고 적게 돌려받을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덴마크 복지 역시 덴마크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만들어놓은 결과물이다. 한국도 자신만의 길을 발견하고 정해야 한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어떤 모습으로 한국의 미래를 만들지 국민들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좀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복지)우등생’에게도 나름의 고민과 과정이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고나 할까. 이제 한국 복지는 시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가야 할 길은 길고, 치열한 싸움이 있겠지만 그 길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 피터 뤼스홀트 한센 주한 덴마크대사 ::

1951년생인 한센 대사는 1978년 덴마크 코펜하겐대 졸업 이후 외교부에 들어갔다. 주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 주베트남 대사 등을 거쳐 2010년 10월 주한 덴마크대사로 부임했다.

인터뷰=노지현 오피니언팀 기자 isityou@donga.com
#덴마크#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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