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의 경제 프리즘]국민대타협委의 대인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일 03시 00분


허승호 논설위원
허승호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 공약을 다 지키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지난주 사과했다. 대통령의 사과는 정권 출범 초 인사 난맥, 윤창중 씨 사건에 이어 세 번째다. 문제는 기초연금 외에 다른 수십 가지 복지공약도 이행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 기회에 복지와 증세의 딜레마를 근본적인 수준에서 정돈하지 않으면 이번 사과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같은 사과가 반복된다면 정부가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복지 확대를 탓할 수는 없다. 1997, 2008년 두 차례의 경제위기와 세계화의 진전으로 양극화와 중산층 해체가 가속됐고 육아와 노후의 불안이 확산되면서 복지 수요가 급팽창했다. 분배와 복지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이를 외면했다면 박 대통령은 당선이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도 복지주의자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복지공약은 민주당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민주당은 ‘192조 원어치의 공약, 197조 원 증세’를 제시한 반면 새누리당은 ‘135조 원의 공약, 증세는 0’을 내놓았다. 물론 새누리당 대선 캠프에 ‘증세 없는 복지론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종인 전 선대공동위원장,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등은 “증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선거 후 정책결정권 그룹에서 배제된 상태다.

선거 공약은 지키는 것이 옳다.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라’는 속담이 있지만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한 발상이다. ‘공약에 집착해 제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까지 받는 박 대통령은 전임자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책임정치의 측면에서 신선하다. 공약의 무게가 박근혜 이전과 이후로 달라졌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도저히 지킬 수 없고 나라의 미래에 부담만 줄 공약이라면? 눈물을 머금고라도 수정해야 한다. 그 또한 꼭 필요한 책임정치의 자세이며 국가지도자로서 도리다.

그렇다면 신뢰 책임과 지도자 책임이라는 두 개의 책임이 충돌하는 형국이다. 무엇을 택해야 할까. 둘을 다 취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양립은 가능하다. 재정현실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하고 국민을 설득해 ‘증세 없는 복지’를 수정하되 그에 따른 정치적 손해를 자발적으로 떠안는 것이다. 그것이 지도자로서 진정한 용기이며 국민은 이런 선택에 감동한다.

대통령은 사과와 함께 “국민대타협위원회를 만들어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알리고 여기서 조세의 수준과 복지 수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통해 최선의 조합을 찾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살펴 읽으면 대통령이 복지에 맞춘 증세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연 것이다. 중대한 변화다.

이제 앞날은 국민대타협위를 어떻게 구성해 어떤 식으로 운용하느냐에 달렸다. 대타협위를 사과에 따른 구색 맞추기쯤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복지공약 전반과 증세 수준에 대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줘야 한다. 대타협위의 구성과 권능에 진정성이 깔려야 한다. 그래야 국민도 수긍한다.

복지제도의 판을 새로 짜는 시기다. 국가의 미래상, 공동체가 공유할 기본가치에 관한 문제다. 여야 봉급생활자 중소자영업자 농어민 기업 노조 등 각계의 이해조정이 필요하다. 야당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적어도 이 주제에서만큼은 ‘상대를 타격할 수만 있다면 뭐든 정쟁(政爭)의 제물로 삼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지와 증세는 원래 진보정파의 전공과목 아닌가. 민주당이 먼저 “사심 없이 참여하겠다”고 나설 만한 위원회다. 대인배(大人輩)라는 신조어가 있다. 김한길 당 대표, 문재인 전 대선후보에게 대인배적 풍모가 요구된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박근혜 대통령#기초연금 공약#복지공약#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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