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를 오버하는 장쾌한 홈런을 날려 결정적인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약 삼만의 관중은 김 군의 홈런 폭발에 흥분해 일제히 일어나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동아일보 1963년 9월 30일자는 그날의 현장을 숨 가쁘게 전하고 있다. 바로 전날인 29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에서 한국이 일본을 3-0으로 꺾고 우승했다는 뉴스였다. 한국은 일본과의 1차전에서 5-2로 이기며 광복 후 18년 만에 처음 일본 야구를 제압했다. 지면에는 ‘일본 타도’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여세를 몰아 2차전마저 일본에 완승을 거둬 ‘60년 구사(球史)의 숙원 달성’이라는 본보 제목대로 새 야구 역사를 썼다. 이 대회에서 김 군은 타격 타점 홈런 우수선수의 4관왕에 올랐다. 그로부터 50년이 흘러 22세의 청년은 고희를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야구장을 지키며 뽀얀 흙먼지를 들이마시고 있다. 프로야구 한화 김응룡 감독(72)이다.
개천절이던 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김 감독에게 높고 파란 가을 하늘 얘기부터 꺼냈다. “날씨가 너무 좋은데. 즐길 여유가 어디 있어. 이거 내일 모레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아주 죽겠어, 죽겠어. 기적인 거 같아. 살아 있는 게.”
올 시즌 한화 지휘봉을 잡고 9년 만에 더그아웃에 복귀한 김 감독은 만년 하위 한화를 살릴 마법의 손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정반대였다. 눈부신 하늘 아래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한화는 5일 끝난 페넌트레이스에서 42승 85패로 꼴찌였다. 승률 0.331로 김 감독의 프로 통산 23시즌 가운데 가장 나빴다.
김 감독이 누구인가. 선수 시절 화려한 스타플레이어였고 1983년 해태(현 KIA) 사령탑을 맡은 뒤 역대 프로야구 최다인 한국시리즈 10회 우승(해태 9회, 삼성 1회)의 대기록을 세웠다. 야구인 출신으로 처음 구단 최고경영자까지 올라 삼성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었다.
그랬기에 김 감독에게 올 시즌은 그 어느 해보다 길고 힘겨웠으리라. 인터뷰 요청도 몇 번이나 사양했던 김 감독은 “인생 말년에 가장 큰 고비가 찾아왔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야구장에선 표정 변화 없이 좀처럼 내색하지 않는 스타일. “참아야지 어떡하겠어. 나가면 선수들이 손자 자식뻘인데.”
화를 삭이면 병이 된다던데 그에게도 남다른 스트레스 해소법은 있었다. “내가 산을 좋아해. 한창 때는 9시간, 10시간을 내리 걸은 적도 있지. 설악산 오색약수터에서 대청봉까지 갔다가 다음 날 바로 원주 치악산에 오르기도 했어. 요즘은 무릎이 아파. 그래도 지방 방문경기를 가면 3, 4시간은 늘 산을 타. 산에 가면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김)태균(한화 4번 타자)이 이 ××, 뭐 이렇게 욕을 하기도 하고. 아마 선수들 귀가 간질간질할 거야. 등산객이 없는 줄 알고 그랬는데 사람이 튀어나와 놀란 적도 있지.”
평남 평원에서 태어난 김 감독은 열 살 때 1·4후퇴를 맞아 아버지 손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사흘만 피하면 된다고 해서 집을 떠났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이젠 감정을 다스릴 만도 한데 어머니, 누나, 형, 여동생 3명과 생이별했다는 대목에서는 여전히 목이 잠겼다.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신청해 봤는데 잘 안 됐어. 사기도 당했어. 주위에 상봉한 뒤 오히려 빨리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더라고. 계속 만날 수 없으니까 더 안 좋았나 봐.”
애절한 가족사를 지닌 김 감독은 가장으로서 몇 점일까. 미술과 음악을 전공한 두 딸(40세, 38세)을 둔 그는 “난 빵점이지 뭐”라며 미소를 지었다. “애들이 어렸을 때 남들은 다 어디 놀러 가는데 뭐냐고 구박을 많이 했어. 아빠가 시합하느라 그런 거라고 변명했지. 졸업식, 입학식 한 번을 못 갔어. 이젠 커서 다 이해해. 애들도 나처럼 무뚝뚝했는데 요즘 아빠 걱정 많이 하네.”
김 감독의 자녀가 아빠 응원을 온 적은 한 번. “1980년대 해태 감독할 때 잠실 경기에 아내와 아이들이 왔어. 그 당시 야구장 분위기 험악했잖아. 지면 관중이 막 난동 부리고. 감독 죽인다고 난리치는 거 본 뒤로 다시는 안 오더라고. 허허.”
김 감독은 부산 개성중 1학년 때 축구로 이름을 날리다 학급 대항 야구대회 선수로 뽑혀 야구와 인연을 맺었다. 부산상고를 거쳐 1961년 한국운수 연습생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월급이 3000원이었어. 요즘 선수들 행복하지. 좀 하면 몇십억, 몇백억 원씩 벌잖아. 일본, 미국도 가고. 땅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는데 그걸 못 주워.” 그러면서 그는 “내 자랑 좀 해도 되냐”고 물었다. “내가 대표팀에서 12년 동안 4번 타자를 쳤지. 그때 프로가 있었으면 돈 좀 벌었을 거야.”
김 감독은 평소 성공 비결에 대해 늘 “운이 좋았다.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고 말하곤 했다. 이른바 ‘복장(福將)’이었다는 것. 하지만 그저 겸손한 표현일 뿐 강한 카리스마, 기본 원칙과 조직의 강조, 철저한 업무 분담 등 그만의 리더십은 늘 빛을 발했다.
올 시즌 한화의 부진에 대해 그는 “투수력과 타격이 모두 약했다. 연패를 끊어줄 류현진 같은 확실한 에이스가 떠난 공백도 컸다. 선수 파악에도 시행착오가 있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마음은 어느새 다음 시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년에는 마지막으로 해봐야지. 승부를 한번 걸 거야. 올해보다 나을 거야. 제대하고 돌아올 선수들도 괜찮고. 4강은 가봐야지. 시즌 끝나고 한 일주일 방바닥에 누워 있다 바로 제주에서 마무리훈련 들어가.”
김 감독은 50세 때인 1991년 본보에 ‘나의 길’이라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프로야구 감독이란 잘할 때는 한없이 추어올려지지만 못할 때는 끝도 없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감독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것은 스릴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감독의 정년은 몇 살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내 대답은 100세였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승부의 긴장감이 경기마다 나의 신경을 옥죄어 오지만 또 그런 긴장감이 삶의 원동력이다.’
프로야구 통산 최다승(1518승) 기록과 함께 최다패(1223패) 기록도 함께 갖고 있는 그가 인생 최고의 고비 앞에서 어떤 마무리를 보여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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