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가 사립문을 열 때/새로이 서늘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초승달이 미세하게 생겨난다.”
근대 한국불교의 선지식 석전 박한영 스님이 쓴 시 ‘새로운 가을밤에 앉아’의 한 부분이다. 빗장을 열 때 추풍이 유입되어 생기는 변화를 풍광뿐만 아니라 심경(心境)에 두루 걸쳐 포착한 절창이 아닌가 한다. 게다가 높은 고독도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 처처에 내리고 있다. 계단을 층층 내려서듯 가을은 내려오고 있다.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가을은 우리들의 가옥에도 들어오고 있다. 단풍은 또 어떠한가. 이번 주 다음 주에는 설악산의 팔 할이 붉게 물든다고 한다. 단풍은 가쁘게 울퉁불퉁한 산맥을 따라 남하할 터이다.
이런 가을날에는 김종해 시인의 시 ‘가을길’의 다음과 같은 시구가 생각난다. ‘굴참나무에서 내려온 가을산도/모자를 털고 있다.’ 이 절묘한 시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가을이 산행을 하는, 하산하는 등산객처럼 느껴진다. 가을이 한 구의 몸처럼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다가온다. 어쨌든 등산객의 보폭과 걸음의 속도로 가을은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일상의 속가(俗家)로 보행을 해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사흘 전 파주 심학산엘 갔다. 가족과 함께 심학산 둘레길을 걸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둘레’라는 말은 물빛처럼 참으로 윤기가 있다. 품이 옹색하지 않고 다소는 너르다. 융통이 있다. ‘둘레’라는 말에는 단도직입이 없다. 이 말에는 시골의 휘어져 나가는 논두렁을 걷는 곡선의 느낌이 있다. 서두르는 조급함도 없다. 모나지 않다. 대화법으로 말하자면 말을 에둘러 하는 화법에 가깝다. 폭력적이지 않아 좋다. 물론 심학산 꼭대기에 곧바로 올라설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담소를 나누며 크고 둥근 궤도, 둘레길을 택해 걷는 상냥하고 선한 사람들을 더불어 만나니 모두의 얼굴과 안광(眼光)이 시월상달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느껴졌다.
둘레길이 걷기 열풍을 타고 전국 곳곳에 적잖게 생겨난 것도 좋은 일이다. 부풀려 말하면 둘레길이 면면촌촌(面面村村) 생겨나고 있다. 둘레길 테마여행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소식이다. 둘레길 가운데서는 지리산 둘레길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전북과 전남, 경남에 걸쳐 있고, 다섯 개의 시, 열여섯 개의 읍면, 여든 개의 마을을 지나갈 만큼 장정(長程)이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심지어 거리로는 삼백여 킬로미터에 달한다. 제주 올레길도 엄살을 좀 부려 말하자면 한라산 둘레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주 올레길은 첫 코스가 열린 후로 매년 새로운 코스를 추가하고 있다. 쪽빛 바다와 오름의 멋진 경치를 선택해서 번갈아 만날 수 있으니 많은 이들이 머물다 돌아가기에 제격이 아닐까 한다. 내가 걸어가 본 강릉 바우길이나 남해 바래길도 걷기의 명소로는 손색이 없다. 구구절절 상세하고 간곡하게 예를 들자면 어디 이뿐이겠는가.
산을 마주하고 오래 앉아 있는 일도 좋지만, 산의 둘레를 걷는 일 또한 신선한 소요의 체험이다. 작고한 이성선 시인은 산에 들면 세속의 문답법을 버리게 된다고 했다.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구름을 조용히 쳐다보며 걸어가는 것, 그것뿐이라고 말했다. 산행에서는 산을 횡(橫)으로 혹은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때로는 높은 곳에서 때로는 낮은 곳에서 바라보아야 산의 면목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진면목을 볼 수 있으려면 거리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둘레길을 걷는 일은 산의 면목을 완성시키는 어떤 심미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둘레’라는 말에는 어떤 율동이 있다.
‘달팽이는/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천천히/그런 천천히는 처음 볼 만큼 천천히/건너가고 있었습니다./오늘의 성서였습니다.’ 이 시구는 정현종 시인의 시 ‘천천히’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편 장석남 시인은 시 ‘시월’에서 “내 눈과 귀의 단추 좀 풀어다오”라고 가을에게 부탁한다. 우리는 이 가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좀 띄엄띄엄 떼어놓을 필요가 있다. 내면에도 소로의 흙길이 있을 것이니 내면의 둘레길을 이 가을에는 걸어볼 일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