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빨리, 남보다 빨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4일 03시 00분


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지하철. 다음 역에서 내린다. 출입구 주변에는 박스아웃(농구에서 리바운드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몸으로 상대 팀 선수를 밀어내는 것)이 한창이다.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어쨌든 내릴 수는 있을 테니. 갈아탄 버스에서도 비슷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주말 강변북로. 포뮬러1(F1)의 분위기다. 차선을 바꾸려는 낌새를 감추고 있던 차량들이 도시고속도로 출구를 코앞에 두고 불쑥불쑥 꺾어 들어온다. 깜박이는 없다. 그럭저럭 사고 없이 다니는 건 결코 운전을 잘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운에 달렸다.

집에 들어와 외투를 벗자마자 TV를 튼다. 하정우가 ‘빠름의 가치’를 설파한다. “느리게 살고 싶다고? 그건 아주 가끔일 뿐이야. 결국 세상은 더 빨리 생각하고 더 빨리 행동하고 더 빨리 도전하는 사람들이 바꿔왔다는 거.” 채널을 돌리며 생각한다. ‘…안 사요.’

지하철과 버스 박스아웃에서 승리한 아저씨의 만족감은 그 뒤 몇 초나 이어졌을까. 강변북로 F1 레이스 우승자는 뒤차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했을까. 더 빨리 행동하는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꿔가고 있는 걸까.

영화 ‘도둑들’의 한 장면. 바에 앉은 김수현에게 접근한 중국 게이 남성이 말한다. “오, 한궈(韓國)? 음…. 빨리빨리!” 2002 한일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자주 입에 담았던 “빨리빨리”는 한국인의 성품을 요약하는 단어로 뿌리를 굳혔다. 그 앞에 한 단어를 더 붙여야 의미가 명확해지지 않을까. 남보다. ‘남보다 빨리.’

박스아웃과 F1의 만족감은 내가 얼마나 신속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문제와는 사실 별 상관이 없다. 절대속도가 아니라 상대속도다. ‘다른 승객보다 한 발 먼저 내렸어.’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던 차들 다 뒤로 따돌리고 빠져나왔어.’ 먼저 내렸으니 그걸로 그만이다. 앞질러 나왔으니 됐다. 빨리 가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보다 앞서 가고 싶었던 것이니까.

1972년 미국 작가 트리나 폴러스가 쓴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에는 수많은 애벌레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 몸으로 쌓아올린 탑이 등장한다. 탑 위에 무엇이 있는지, 왜 오르는지, 스스로 탑의 일부가 된 애벌레들 중 누구도 모른다. 다들 오르니 오른다. 나만 오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으니까.

공연 담당을 맡고 3개월여 동안 가장 신선한 감흥을 준 한 연극의 연출가를 만났다. 그 공연에는 새로워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없었다. 다르게 보이고 싶어 하는 조급함도 없었다. 전하려는 바가 뚜렷했고, 그러자니 기존과 다른 방법이 필요했고, 자연스레 변화가 일어났다. 인터뷰를 마치고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가 쑥스러워하며 답했다. “2G예요. 019-OOO-….”

빨리 터지는 전화가 세상을 바꾸는 힘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 잠깐 멈춰 앉아 생각하면 누구나 알 만한 거짓말이다. 지금, 왜 남보다 빨리 가려 하나. 답할 수 있는가.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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