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염재호]일본 지식인의 국수주의를 우려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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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국이 역사인식 부족” “언제까지 사죄 반복해야 하나” 일본 지식인들 궤변
20세기 국가주의에 갇힌 그들… 한일국민 인식 왜곡시킬 우려
인류 보편 가치 외면하면 글로벌시대 주역이 될 수 없어

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이번 달 일본 ‘문예춘추’지(誌)에 지식인들의 좌담회가 실렸다. 도쿄대 교수, 전 주한 일본대사 등 사회 여론을 주도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최근 한중일 관계에 대해 논의를 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인식이 최근 아베 신조 총리 등 보수 정치인들의 인식 못지않게 국수적(國粹的)이라는 사실이다. 문예춘추가 보수적 월간지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시사 월간지임을 감안한다면 여론에 미칠 영향은 작지 않다. 왜냐하면 아직도 20세기 국가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가 한일관계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도 ‘중국과 한국과의 백년전쟁을 준비하라’였다. 핵심적 논지는 한국과 중국이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본은 이들과 맞설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벌써 60년도 더 지난 할아버지 시대의 전쟁을 아직도 되뇌고 있다고 비판한다. 언제까지 총리가 사죄를 반복해야 되는가. 한국은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과거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단죄하고 있다. 여러 측면에서 한국과 중국은 아직 근대화한 국가가 아니다. 중국은 청나라 제국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한국은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에 다시 의존하려고 한다. 아직도 매춘이 남아 있는 한국사회는 자신들이나 먼저 스스로 반성하고 위안부 이야기를 하라. 한국과 중국은 역사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등 신랄한 비판 일색이다. 게다가 매우 과장된 한국 체험까지 소개하면서 선동적인 이야기를 서슴지 않고 쏟아내고 있다.

20여 년 전 필자가 일본에 체류하면서 느낀 큰 충격 중 하나는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중국을 침략한 것은 일본의 잘못이 아니라 당시 군국주의 탓이라는 것이다. 이런 군국주의로 인해 일본 국민도 전쟁의 피해를 봤고, 그 결과 무고한 시민이 원자탄 폭격 피해를 입은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라는 피해의식이 팽배해 있다.

여러 해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 씨가 한국에서 김지하 씨와 TV 대담을 했다. 오에 씨는 일본 내에서 핵문제를 비판하고 평화헌법 수호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대표적 지성인이다. 자신은 전후 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 일본 국왕이 수여하는 문화훈장은 받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매년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그에게 김지하 씨가 던진 질문은 신랄했다.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한 한국인 희생자는 전체 사망자의 10분의 1이 넘는 2만여 명이나 된다. 그런 한국인들을 위한 위령비가 1999년까지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결국 핵 반대 평화운동도 일본인들만을 위한 국수주의적 평화운동에 불과하고 일본인들은 핵문제를 인류의 보편적 문제의식에서 접근하지 못했다는 비판이었다. 당시 오에 씨의 당혹한 표정은 인상적이었다. 사실 오에 씨는 김 씨가 군부독재에 고통 받고 있을 때 구명운동에 앞장선 대표적 일본 지식인이었기에 김 씨의 이런 지적은 매우 뼈아픈 것처럼 보였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최근 국수주의적 경향은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일본 군국주의로 인해 일본 국민들도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 일본의 번영과 국가의 존엄성을 위해 2차대전의 1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아베 총리가 일본 항공자위대 마쓰시마 기지를 방문해 훈련기 중 731기에 탑승하여 기념사진을 찍은 것은 우연이었다고 변명하는 것도 궁색하다. 만약 우연이라고 한다면 한국인 중국인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인간 생체실험을 한 731이시이부대의 잔학성도 모르는 근대 역사에 무지한 정치인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 단순히 국가 간 근대 역사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20세기 인류가 저지른 인간성의 파괴를 외면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성적 노예로 수단화하고 생체실험을 마지않는 잔혹성을 보인 것에 대해 조상들과 군인들이 저지른 것이라 자신들은 책임 없다고 발뺌하는 일본이 21세기 글로벌시대의 주역이 될 수는 없다. 일본이 아름다운 나라, 21세기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류 보편적 이념과 가치에 대한 지도자들의 인식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 그래야만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 같은 선한 이웃 일본 국민의 눈물을 닦아낼 수 있다.

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jaehoyeom@icloud.com
#일본#역사인식#국수주의#제2차 세계대전#아베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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