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1>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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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한기팔(1937∼)

사면이 유리(琉璃)의 벽(壁) 같은
깊은 고요 속
낮은 산자락에
푸른 대문이 있는
그 집
빨랫줄엔
빨래가 다 마르고
바지랑대 높이
구름 그림자 지나가니
하늘은
그대로 환한 거울 속인데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온종일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 어떤 우리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그림이 있다. 단풍 든 불국사,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 노란 호박이 익어가는 산골짝의 초가집…. 초등학생 책받침이나 사계절 풍경이 담긴 옛날 달력에서 볼 수 있었던 고향 풍경 같은 사진이나 그림들. 달력에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이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원형적 이미지로 담겨 있다.

한국의 가을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르는 시다. 빨래도 깨끗이 말라가고, 집도 구석구석 깨끗할 테다. 하늘도 청소를 한 듯 깨끗이 새파랗고, ‘그대로 환한 거울 속’이다. 조용하고 맑은 날. 온 동네가 이리 조용하리라. 화자는 ‘창이란 창을 다 열어 놓고’ 있다. 창을 여는 마음은 초대의 마음. 와 다오, 들어와 다오. 바깥 것이 내 안에 들어왔으면! 새도 좋고 잠자리도 좋고, 누구라도 좋지만 젊은 여자라면 더 좋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더 좋으시리. 분주하고 소란한 세속에서 비켜난 정일(精一)한 삶과 인간이 갖고 있는 근원적 그리움이 쓸쓸하고 깔끔하게 그려져 있다.

집을 집이게 하는 게 뭘까. 지붕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매우 실용적 사고방식을 가진 거다. 대개의 예술가는 집을 집이게 하는 게 창이라고 생각하리라. 창이 없는 건물은 창고와 다름없다고. 바깥과 안의 경계를 없애주는 창! 이십여 년 전 사주와 관상을 잘 본다는 이가 내 맞은편에 앉았던 술자리가 있었다. 그를 초대한 친구가 내 관상을 봐주라 부탁하자 그는 흘깃 나를 보더니 심드렁히 단 한마디를 했다. “저 사람은 죽은 사람이네요.” 그게 무슨 뜻인지 간간 궁금했는데 내가 삶이 닫혀 있는, 창 없는 사람이란 뜻이었나 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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