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채동욱 사퇴 둘러싸고 정파 편향논란 휩싸인 신문
보수-진보의 틀에 얽매여 독자를 교화하려 해선 안돼
정치적 색깔 이전에 정확성-객관성의 가치가 요구된다는 사실 상기해야
영국 사람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 그에 대해 알고 싶을 때 “무슨 신문을 보세요?”라고 묻는다. 어떤 신문을 보는지 알면 그의 취향, 정치적 색깔, 학력, 경제적 수준을 대부분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타임스를 본다고 하면 보수당 지지자에다 전통적 명문학교를 나온 관리직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가디언을 본다고 하면 노동당 지지 성향의 하위계층 혹은 비판적 지식인일 개연성이 높다. 두 신문의 경쟁 속에서 창간된 인디펜던트를 본다면 객관적 신뢰를 중시하는 중산층일 가능성이 크다. 경제신문인 파이낸셜타임스는 당연히 돈 많은 사람들의 필수품이다.
신문의 이런 색깔 때문에 재미있는 유머가 만들어졌다. 1980년대 세계 사회과학계가 국가론 논쟁에 휩싸여 있을 때 ‘국가를 소유한 사람은 파이낸셜타임스를 보고,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은 타임스를 좋아하고, 국가가 어떻게 경영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인디펜던트를 보고, 국가가 어떻게 경영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가디언을 본다’는 유머가 풍미했다. 한국 상황에서는 각 위치에 어떤 신문이 들어가야 할지, 재미있게 맞춰볼 만하다.
그런데 신문이 지나치게 정치적 색깔을 띠면 신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구독률 역시 낮아지게 만든다. 정치에 대한 편향을 자제하는 일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신문들은 인구 1000명당 발행부수 순위에서 번갈아 1위를 다투는 데 반해 정치에 대한 연관성이 강한 영국과 미국에서는 신문 구독률이 매우 낮다. 인구 1000명당 발행부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일신문의 총 발행부수에서도 일본의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이 세계 1, 2위로 각각 1000만 부 이상을 발행하는 데 반해 영국의 최대 일간지 더 선은 260만 부 수준이고 미국의 최대 일간지 유에스에이투데이는 200만 부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일본의 경우 도쿄를 근거지로 하는 요미우리신문과 오사카를 기반으로 하는 아사히신문 사이에 지역과 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정확성과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동일하다. 아사히신문은 자사 신문에 게재되는 광고의 내용이 정확한지 아닌지를 조사하는 인력만 20명을 두고 있다. 요미우리신문 역시 광고조사부라는 팀을 별도로 두어 광고 내용의 정확성을 사전에 조사한다. 신문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63%에 달하는 것은 이러한 정확성과 엄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때문이다.
자국의 공공기관과 조직 가운데 신뢰하는 대상을 꼽으라는 조사에서 일본 사람들은 늘 신문을 1위로 꼽아 왔다.
우리나라에서 최대 발행부수를 자임하는 신문이 130만 부 정도 수준에, 신문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13∼30%를 오가는 것과 대조적인 현상이다.
정치적 색깔 이전에 신문에 요구되는 덕목은 정확성과 객관성이다. 최근 국정원 댓글사건과 채동욱 전 검찰총장 사퇴를 둘러싸고 신문들이 정파 편향적 논란에 휩싸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신문의 독자들은 아예 오랫동안 구독하던 신문을 바꾸어 버리기도 하였다. 30년 혹은 40년 보아 온 신문을 바꾼다는 게 개인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일인데 말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색깔에 신문들이 지나치게 자신을 옭아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보수나 진보라는 구획이 기존의 질서로부터(from) 탈출하는 데에는 큰 차이를 갖는 방법을 서로 제시하였으나, 새로운 사회를 향한(to) 핵심적 요소들을 배양하는 데에는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청렴과 신뢰 같은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안의 핵심적 요소인데, 이를 위한 대안이 보수와 진보로부터 다르게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치적 색깔을 선명히 함으로써 신문이 당장 자신의 독자들을 확인할 수 있겠으나, 장기적으로 신뢰를 쌓고 구독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많은 독자들이 이제 신문의 활자 앞으로 나아가 자신이 지지할 수 있는 논조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