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칼럼에서 남의 눈의 티끌만 봐 온 것 같다. 가을 하늘이 높아지니 문득 ‘내 눈의 들보는 없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3년째 영화 담당 기자로 일하며 자기반성을 해본다.
영화 기자의 임무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 아니 관객이 볼 가치가 있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를 선별하는 것. 하지만 기자 개인의 몸 상태와 여러 조건에 따라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기도 한다.
어느 날, 옆 자리 낮선 젊은 남자 기자가 앉았다. 내가 먼저 올려놓은 팔걸이에 그가 팔꿈치를 들이밀었다. ‘어라, 이 친구 봐라.’ 지하철 좌석에서 남자들이 무릎으로 신경전을 하듯, 팔걸이 신경전이 시작됐다. 기침을 해보고, 엉덩이를 꼼지락거리며 신호를 줘도 꿈쩍 않는다. 2시간 동안 영화를 봤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당연히 리뷰 기사는 부실해졌다.
나와 ‘그 자’처럼 철없는 남자들을 위해서 멀티플렉스 상영관 메가박스는 팔걸이를 두 쪽으로 만들었다. ‘사소한 걸로 싸우지 마세요.’ 메가박스의 팔걸이를 보며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전날 술을 먹으면 오전 10시 반 시사회는 죽을 맛이다. 하필 이런 날 아트영화가 걸린다. 2011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최우수작품상)을 받은 테런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 2012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에 빛나는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숙취 관람의 피해자들이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 부정(父情)에 대한 ‘트리 오브 라이프’의 심오한 메시지는 해장국에 대한 갈망에 밀려 기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잠을 푹 잔, 컨디션이 좋은 날 밤 시사회에서 본 영화에는 후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다. 감성이 풍부해지는 오후 8시 시사회, 어떤 영화를 봐도 ‘음, 나름 볼만해’라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건축학 개론’ ‘더 테러 라이브’ 등이 이런 경우.
남들은 영화 기자가 팔자 좋은 직업이라고 한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데스크 전화를 받고도 ‘시사회 중입니다’라고 끊을 수 있는 게 얼마나 좋냐”고 한다. 하지만 나름대로 애환이 있다. 많은 날은 하루 4편의 시사회가 있다. 오전 10시 반, 오후 2시, 4시 반, 8시. 하루 종일 극장에 있다 보니 시력이 나빠지고, 폐소공포증도 생긴다.
기자 시사회에서 영화를 봐도 관객이 볼만한 작품인지 판단이 안 될 때가 있다. 이런 때도 일반 시사회를 찾거나 개봉 뒤 상영관을 간다. 서너 번 본 영화도 부지기수. 객석 맨 뒷자리에 앉아 관객 반응을 살핀다.
지난해 ‘늑대소년’ 때는 옆자리에 앉은 10대부터 50대까지 여성 관객이 모두 울었다. ‘부러진 화살’을 보고는 20대 여성 관객이 사법부를 비판했다. ‘영화가 흥행하겠구나, 파장이 있겠구나’라는 감이 온다. 곽경택 감독의 ‘미운 오리 새끼’를 보고는 한 여성 관객을 졸졸 따라가 물었다. “(영화가) 어떠세요?” 돌아온 대답. “댁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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