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실에 온 ‘조폭’(조직폭력배)이 자신을 조사할 검사를 걱정한다. 바로 정영서 검사(31·사법연수원 37기)다. 2월부터 부산지검 강력부에 배치된 정 검사는 여검사 최초로 조폭을 전담하고 있다. 수원지검 평택지청 형사부에서 처음으로 조폭 사건을 수사했던 그는 ‘조직폭력 담당이야말로 내가 검사라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결국 정 검사는 조폭사건으로 유명한 부산지검에 발령받으며 강력부를 지원했다. 조폭들이 자주 묻는다는 질문에 정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로서 조폭을 상대하는 게 무섭지 않으냐고요? 그들도 똑같은 사람인 걸요.”
검찰과 법원 안에서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다는 여성 검사와 판사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임용된 김소영 대법관(48·19기)은 법원행정처 최초로 여성 심의관을 지냈고 대법원의 첫 여성부장 재판연구관을 거쳤다. 매해 인사 때마다 공안, 특수, 강력부 같은 주요 부서에 처음으로 여검사를 배치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매년 기수별로 임용되는 판검사 가운데 여성이 절반을 넘어선 지는 오래됐다. 법무부와 대법원에 따르면 올해 2월 임관한 42기 검사 중 여성은 71%(32명), 지난해 2월 임관한 41기 판사 중 여성은 64%(55명)였다(42기부터는 경력법관제가 도입돼 법관 임용이 바로 되지 않음). 15년 전까지만 해도 기수별로 여성 판검사는 10명 내외였다. 1호 여판사(고 황윤석)와 여검사(조배숙 임숙경 변호사)가 배출된 지 각각 59년과 31년 만의 일이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사법시험 합격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41.7%로 2004년(24.4%)보다 1.7배로 증가했다. 여성이 늘어난 검찰과 법원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을까.
○ 똑 소리 나게 일 잘하는 여성 판검사들
여성 판검사가 늘어나면서 수사나 재판의 질이 높아졌다는 데 대해서는 남녀 모두 이견이 없다. 특히 여검사 중에는 남성만 잘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분야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 범죄 수사에 뛰어난 김윤희 검사(38·31기)가 대표적이다. 검찰이 7월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기소할 수 있었던 건 5년 전 김 검사가 한 USB메모리에서 지워진 자료를 복구한 게 큰 도움이 됐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은 CJ그룹 전 재무2팀장 이모 씨의 청부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이 씨가 이 회장의 차명재산을 관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경찰은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는 이 씨의 USB메모리를 압수했지만 깨끗이 지워진 자료를 모두 복원하진 못했다. 하지만 김 검사는 USB에서 이 회장의 국내 차명재산 관리 파일, 미술품 거래 내용 파일, 이 씨가 이 회장에게 복직을 요구하며 쓴 협박성 편지 등을 복원했다. 이 자료들은 이 회장에 대한 수사의 실마리가 됐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가해자를 기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아픔까지 치유해주는 검사도 있다. 서울남부지검에서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신승희 검사(38·35기)는 지난해부터 한국표현예술심리치료협회와 함께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예술치료를 실시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재경 지검의 한 남자 부장검사는 “수사는 윽박지르거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논리와 증거로 한다. 여검사는 증거를 모으고 논리적으로 묻는 데 탁월해 피의자가 더 무서워한다. 강력사건뿐 아니라 꼼꼼함이 필수인 금융사건도 잘 처리한다”고 말했다. 다른 부장검사는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남자는 모르는 특유의 상황을 여검사는 잘 뽑아낸다. 성폭력을 당했다며 허위로 고소한 여성을 무고죄로 기소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 가정일로 신경쓰는 여성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이 주요 부서에 들어가는 건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직도 ‘○○지검 공안 특수 강력부에 여검사가 처음으로 배치됐다’는 게 뉴스거리가 되는 게 그 증거라는 것이다.
재경 지검에 근무하는 한 여검사는 “핵심부서는 기존에 근무하던 여검사가 나오지 않는 이상 다른 여검사가 또 들어가긴 어렵다”고 말했다. 다른 여검사는 “윗선에서 정책적으로 주요 부서에 여검사를 배치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들어가긴 힘들다”고 했다.
특히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건 여검사가 여판사보다 드물다.
법무부와 대법원에 따르면 부장검사와 부부장검사를 포함한 고검 검사급 검사 중 여성 비율은 현재 3.4%(18명)지만, 지법 부장판사 중 여성 비율은 11%(57명)이다. 지금까지 여성 대법관은 김영란 서강대 석좌교수(57·11기), 전수안(61·8기), 박보영(52·16기), 김소영 대법관에 이르기까지 4명이 나왔다. 하지만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검사장 자리에 오른 여성은 아직 없다. 첫 여성 검사장이 될 거라며 주목을 받았던 검찰 내 ‘맏언니’ 조희진 법무연수원 연구위원(51·19기)은 올해 4월 승진 대상자에 들지 못했다.
남성 판검사들은 “실력이 있으면 배치하는 거지 여성이라고 차별하는 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여자와 함께 일하기 꺼리게 되는 점을 조심스레 꼬집는다. 한 남자 부장검사는 “공안부나 특수부 같은 인지부서는 야근도 많고 희생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검사들은 가정이나 육아 문제로 신경쓰는 일이 많아 선뜻 받기가 주저된다”고 했다.
○ 폭탄주 문화도 바꾼다
검찰과 법원에 여성이 늘면서 남성 위주의 조직문화도 변하고 있다.
특히 폭탄주로 대변되던 검찰과 법원의 회식문화가 확실히 바뀌었다는 평이다. 여성들은 남성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 기혼 여성은 살림과 육아 때문에 늦게까지 술자리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점심에 회식을 하고 커피 한 잔씩 마시며 들어오는 부서가 많아졌다. 저녁을 먹더라도 ‘소맥(소주+맥주)’보다는 와인을 마시고 스포츠나 영화를 즐기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변화를 아쉬워하는 남성들도 있다. 한 남자 부장검사는 “술을 마시는 건 노는 게 아니다. 팀워크도 다지고 일하면서 서로 감정 상한 걸 풀 수도 있는데 그런 기회가 사라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남성 위주의 공간에 여성들이 들어오다 보니 사소한 불편함도 생긴다고 한다. 한 남자 판사는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낮잠도 자고 여름에는 편하게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야근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남자들은 전용 휴게실도 없으니 쉬는 게 불편하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여성 배석판사들과 함께 근무하는 부장판사의 유의점’이라는 매뉴얼을 나눠주기도 했다. 여기에는 △여성 판사와 둘이서만 사무실에 있게 되면 문을 열어둬라 △야근을 위해 저녁을 먹을 때는 여성 배석이 요청하지 않는 이상 따로 한다 △음주 후 택시로 귀가하는 경우 차번호를 적어뒀다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확인한다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법원은 “이해 부족으로 생기는 오해나 불편한 상황을 예방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으나 남자 판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소한 것까지 다 신경 써야 하느냐”는 불만도 나왔다.
○ “남성화될 필요는 없다”
여성 판검사들이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필요한 점은 무엇일까.
먼저 여성들에게서 자성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한 여검사는 “위까지 올라가려면 일을 잘하는 것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야 한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했다. 다른 여검사는 “술은 못 마셔도 동료들과 일 외에도 같이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남성의 경우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여검사는 “아직 부장이나 차장은 대부분 남성이니까 여검사를 쓰는 모험을 잘 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익숙한 사람, 함께 일해 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남자만 쓰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다른 여검사는 “여자는 한 명이 잘못하면 ‘저래서 여자들은 안 돼’라는 식으로 호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됐다”고 했다.
‘여성 판검사들이 성공하려면 남성화돼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남성들이 더 적극 반박했다. 한 남자 부장검사는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조직에 여자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약간의 부조화일 뿐 차차 나아질 것이다. 여성들이 남성적으로 변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 남자 부장판사는 “여성 비율이 낮을 때는 남자처럼 일하는 게 승진을 위한 덕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원 자체가 많아져 요직에 나갈 여성도 많아졌다. 남성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