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하정웅, 메세나를 창조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3일 03시 00분


가난 속에 성장한 재일동포… 문화 소외된 지방 미술관 골라 50년 수집한 1만 점 기부
정부의 문화 지원 늘었지만 문화 아끼는 국민 더 많아져야 ‘문화 선진국’ 이뤄진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일본 아키타에서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던 재일동포 소년은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그는 20대부터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도쿄의 한 미술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불타오르는 듯한 작품을 마주하고 전율을 느낀 뒤였다. 도쿄 인근에서 가전제품 판매업을 시작했다. 마침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자 TV수상기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상당한 돈을 벌었다. 부동산 임대업에 나섰다. 돈이 모이면 재일동포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구입했다.

1980년 일본의 한 미술잡지에서 화가 이우환 씨를 다룬 특집 기사를 발견했다. 뛰어난 화가임을 직감했다. 잡지 500권을 구입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다. 이 씨와는 4년 뒤인 1984년 처음 대면했다. 유럽 전시회를 앞두고 있던 이 씨가 지원을 요청해 왔다. 700만 엔을 후원했다. 이 씨의 작품 41점을 수집했다.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씨는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주말 서울역 문화관에서 열린 ‘문화의 달’ 기념식에서 이 씨는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수상 소식을 듣고 그는 행복감에 젖었다.

그가 모국을 처음 찾은 것은 1973년이었다. 고향이 전남 영암인 아버지를 모시고 방문했다. 이때부터 한국 화가의 작품 수집에 나섰다. 1993년 갓 개관한 광주시립미술관을 찾았을 때 그는 텅 빈 전시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건물은 잘 지어 놓았으나 내부를 채울 미술품이 없었다. 이 미술관에 수집품을 기증하는 것이 숙명처럼 여겨졌다. 지난해까지 2300점을 보냈다.

대전 포항 부산의 시립미술관, 전북 도립미술관에도 기증 행진을 이어갔다. 그가 지금까지 국내에 기증한 미술품은 7700점이고, 무용가 최승희의 사진 등 역사 자료를 포함하면 모두 1만 점이 넘는다. 50년 동안 모아온 수집품의 95%를 모국에 기증했다.

이 스토리의 주인공 하정웅 씨(74)는 우리 문화계에서 돋보이는 존재다. 한 개인이 1만 점 이상 기증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기증 방식도 눈길을 끌 만하다. 하 씨는 수집품을 주로 지방의 공공 미술관에 보냈다. 소외된 곳에 문화의 싹을 틔우고 싶었다.

하 씨의 메세나(문화예술 후원) 활동은 우리의 국가적 목표인 ‘문화 선진국’ 진입을 위해 큰 의미가 있다. 최근 문화예술을 둘러싼 환경은 부쩍 개선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문화가 있는 삶’을 내세우며 ‘문화 재정 2%’를 약속했다. 정부 예산 가운데 문화 관련 예산을 전체의 2%까지 늘리겠다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산만 해도 올해 4조1000억 원에서 내년에는 4조3300억 원으로 5.7% 늘어난다. 박근혜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17년에는 문화 재정이 연간 7조8000억 원에 이르러 2% 공약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국가 주도의 ‘문화예술 키우기’는 부작용도 피할 수 없다.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 창작이 왜곡될 여지가 있다. 공산주의 국가들만큼 예술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나라도 없다. 그러나 이 국가들의 창작품은 유치한 체제 선전물에 머물렀다. 미국이 문화예술 지원에서 민간 차원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산 낭비의 가능성도 높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축제 등에 막대한 돈을 쓰지만 과시성이나 소모성이지, 그다지 문화 발전으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정부의 문화 지원도 이런 식이라면 외화내빈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하 씨처럼 문화예술에 열정을 지닌 국민이 늘어나야 문화예술의 토양이 풍요로워지고 문화 선진국이 가까워진다. 그러나 기부문화를 분석한 국내 조사에서 전체 개인기부자 가운데 문화예술 분야에 기부했다는 사람은 0.2%에 불과했다. 우리의 문화예술 후원은 아직 척박하다.

메세나 활동은 엄청난 부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고 있다. 하 씨는 가난하게 태어나 큰돈을 벌지 않았음에도 누구보다 가치 있는 메세나 활동을 했다. 그가 기부한 미술품은 올해부터 2015년까지 전국 8개 시립미술관을 순회하면서 전시되고 있다. 지방 주민의 문화 혜택에 기여할 것이다. 하 씨는 메세나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10월 문화의 달을 맞아 많은 국민이 문화예술의 후원자가 되는 그날을 기다려 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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