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종영한 드라마 ‘내 딸 서영이’의 여자 주인공 이서영은 일과 가정에서 완벽한 여자다. 국제기업 전문 로펌에서 근무하는 서영은 일찍 퇴근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남편 및 시부모와 이야기꽃을 피운다. 입맛 없는 시어머니를 위해 아침에 죽을 끓이는 건 애교다. 주말에는 남편과 테니스를 치거나 영화를 보는 등 데이트를 즐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이런 생활이 가능할까?
대형 로펌에서 10년째 근무 중인 A 변호사(여)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한다. 남편,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집에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건 아들의 자는 모습뿐. 한번은 어쩌다 일찍 퇴근해 집에 갔는데, 갑자기 수임 사건과 관련해 회의가 소집돼 밥을 먹다 말고 1시간 넘게 전화를 받았다. 주말도 절반 정도는 출근하고, 회사에 나오지 않으면 식탁에 서류 더미를 쌓아놓고 봐야 한다.
3월 박시환 전 대법관이 사법연수원 특강에서 “잘나가는 로펌의 여자 변호사들은 시집을 못 가거나 시집을 가서도 이혼을 한다”고 말해 큰 논란을 빚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보도자료를 내 반발했고, 박 전 대법관은 사과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여성 변호사들이 처한 실상이 그만큼 어렵다”는 반응도 나왔다. 전문 직종이라는 이유로 근로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금기시돼 있는 여성 변호사들의 세계.
전체 변호사의 15.9%(1995명)를 차지하는 여성 변호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 들어갈 때 어렵고, 들어가서는 더 어렵고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여성 변호사는 검사(지난해 기준 440명)나 판사(733명)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변호사 업계는 아직도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강한 편. 업무가 곧 수익과 연결되는 만큼 여성들이 주도해서 기존 문화를 바꾸기는 쉽지 않고, 그럴 만큼 지배자적 위치까지 올라간 여성도 별로 없다는 지적이 많았다.
여성 변호사들은 채용에서부터 차별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대한변호사협회 여성변호사특별위원회가 지난해 여성 변호사 3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7.7%가 취업 시 남성보다 불리하다고 답했다.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한 남성 변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반대되는 결과였다. 그는 “사법연수원 졸업 시 상위권만 유명 로펌에 원서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지원자 중 70∼80%가 여자다. 하지만 로펌 입장에서는 여자만 뽑을 수 없으니 비공식적으로 남자 지원자를 뽑을 수 있는 여러 기준을 둔다. 이걸 뚫고 들어온 여성 합격자는 굉장히 우수한 인력들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성 변호사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중소형 로펌에 근무하는 B 변호사(33)는 “여자 변호사들은 입사 단계가 제일 힘든 것 같다. 결혼을 할 경우 임신과 출산 등으로 야근도 많이 못하고 주말 일도 잘 못할 거라는 선입견들이 있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일하는 C 변호사(39)는 “우리 때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여성 변호사가 취업이 제일 늦었다. 결혼하고 애 낳을 나이라면서 기피한다”고 했다.
업무상 차별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업무 분야가 팀별로 세분돼 있는 대형 로펌과 달리 중소형 로펌에서는 여성 변호사에게 자연스럽게 가사 사건을 배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무실에 여자가 한 명 있는 중소형 로펌에서 근무했다는 한 변호사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에게는 매번 이혼과 같은 가사 사건만 왔다고 한다. 그는 “가끔 다른 사건이 배당돼도 민사 사건이지, 굵직한 형사 사건은 모두 남성 변호사에게 돌아갔다”고 했다.
의뢰인이 여성 변호사를 꺼린다는 이유로 주요 사건을 맡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5대 로펌 중 한 곳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 변호사는 “나한테 사건을 맡기면서도 여자라 일 처리를 적극적으로 못할 거라는 편견을 갖는 의뢰인이 종종 있다. 이런 경우 회사에서는 신뢰를 높이려고 나이가 지긋한 남성 변호사를 같이 붙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 스트레스 때문에 출산 후유증 많다
로펌에서는 여성다움을 버려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가 존재한다. 사건을 수임하려면 술과 골프 등 남성 중심의 속칭 ‘영업 문화’가 필요해서다.
대형 로펌 소속의 한 여성 변호사는 “검찰과 법원에서는 여자들 때문에 술자리 문화가 많이 바뀌었다는데, 로펌에서는 술자리가 여전히 평등하다. 술을 못 마시면 사건 수임도 못하고 도태된다는 우려 때문에 여자들도 거의 빼지 않는다. 경쟁이 심한 곳이라 다들 그런 점을 잘 안다”고 말했다.
물론 이에 대한 남성 변호사들의 반박도 있다. 술을 마시는 게 친분을 쌓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그보다는 얼마나 실력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남성 변호사는 “요즘은 술 잘 먹고 노래방에서 탬버린 잘 치고 같이 골프 친다고 사건을 맡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소형 로펌에서는 출산휴가를 쓰는 것도 눈치 보이는 분위기라는 지적도 있다. 특히 지금까지 여성 변호사를 채용해 보지 않은 작은 변호사 사무실은 출산휴가가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변협의 설문 대상자 중 출산 경험이 있는 여성 변호사는 37%였는데 이 중 34%가 출산휴가를 써보지 못했다고 답했다. 출산휴가를 사용해 본 변호사들 중에도 법정 휴가 기간(3개월)을 채우지 못한 응답자가 25%(1개월 6%, 2개월 19%)나 됐다. 출산 경험자 중 직업 스트레스 때문에 임신 합병증, 불임, 유산이나 조산의 위험을 겪어본 적이 있는 변호사는 28%였다.
한 여성 변호사는 “자궁에 혹이 있었다. 그런데 출산휴가 3개월 쓰고 나서 또 수술받는다고 할 수가 없어서 추석 연휴 기간에 몰래 받았다. 4시간이 걸린 수술 후 추가 휴가를 신청하지 않고 (바로) 일을 했는데, 하혈을 하곤 했다”고 토로했다. 육아는 더 어려운 부분이다. 육아휴직을 써본 여성 변호사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변호사는 “출산휴가 기간(3개월)에 입주 아주머니를 구해서 맡기고 복귀했다. 그나마 변호사니까 입주 아주머니라도 쓸 수 있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로펌이나 법원에 착유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도 없다. 일정도 바쁜데 공간도 여의치 않으니 모유 수유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변호사도 있었다.
○ 연줄도 챙기고 아부도 하고
‘롤모델’을 갖기 어렵다는 점은 여성 변호사들을 더 막막하게 한다. 아직까지 대형 로펌에서 여성이 파트너 변호사가 되거나 개업해서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을 계속해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한 남성 변호사는 “남자들의 경우 선배들을 보면서 10년, 20년, 30년 뒤 모습을 그린다. 가정과 회사는 어떻게 병행하면 될지, 술은 일주일에 몇 번 먹으면 될지 등 세세한 상담도 받는다. 하지만 여자들은 그런 롤모델이 없으니 굉장히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여성 변호사의 커리어는 대개 두 갈래로 나뉜다. 가정을 버리고 일에 다걸기(올인)해 파트너 팀장급이 될 건지, 적당히 수임한 일을 처리하면서 가정생활을 병행할 건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생활을 원하면 여성은 결혼이나 출산 전후로 사내 변호사나 공공기관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한 여성 변호사는 “아이를 보는 데 시간을 좀 투자하고 싶은데 로펌에서는 전혀 불가능해서 사내 변호사나 공공기관으로 가려는 여자들이 많다. 급여는 로펌에서 받는 것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아이와 지내는 데 만족한다”고 전했다.
대한변협은 7월 일·가정양립위원회(위원장 조현욱 변호사)를 신설하고 변호사들을 상대로 근무 환경과 임신 출산 육아 경험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위원회는 앞으로 여성 변호사들이 임신이나 출산으로 사직 압박을 받은 사례가 있는지 조사하고 대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또 출산휴가 기간에 대직 변호사를 중개하기 위한 센터를 개설하고, 대직 변호사를 쓰는 비용 일부를 대한변협에서 부담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여성들이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여성 변호사는 “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남자들처럼 연줄도 챙기고 때로는 아부도 하고 술이나 골프도 하는 등 일 외적인 것도 챙길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여성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여자 변호사는 맡은 사건 외에 가정사나 육아 문제까지 상담해 주는 토털 서비스를 할 수 있다. 남자 변호사는 가질 수 없는 강점을 특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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