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혐일 최고조이던 시절 목포서 고아들 위해 삶 바친 다우치 지즈코와 윤치호
숱한 박해-역경속 손 맞잡고 박애정신 실천한 韓日부부
자신만 사랑하는 두 나라에 “서로 배려하라” 말하지 않을까
“서울에서 일본말만 들려도 술병이 날아가던 1960년대였습니다. 그런 반일(反日) 혐일(嫌日)의 시절이던 1968년, 목포 시민들은 한 일본 핏줄 부인의 임종에 시민장(葬)을 치렀습니다. 일본 고치(高知) 태생으로 처녀 시절 이 땅에 왔다가 서남해안 갯가, 목포에서 고아 3000명을 거두어 기르다 운명한, 그녀의 명복(冥福)을 시민 모두가 두 손 모아 빈 것입니다.”
이달 30일 서울 시내에서 열리는 모임(수림문화재단 주최)의 초대장 첫 부분이다. 모임의 이름은 “‘갯가의 성녀’ 윤학자 탄생 101주년에 생각하는 한일”. 모임 다음 날인 31일은 성녀의 생일이자 45번째 기일이기도 하다.
윤학자. 일본명은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 한국에서 ‘고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인물이다. 원래 젊은 기독교 전도사였던 윤치호 씨가 목포의 다리 아래에서 추위로 떨고 있던 아이 7명을 데려다 키웠던 게 시작이었다. 1928년 보육원 ‘공생원’이 생겨났는데 거기서 봉사활동을 한 사람이 당시 여학교 음악교사였던 지즈코 씨. 10년 뒤 둘은 결혼했다.
1945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을 맞자 남편과 함께 목포에 남았던 그녀는 일본인이란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거기에 맞선 이가 공생원 아이들과 졸업자들. “일본인이지만 우리의 소중한 어머니이기도 하다”며 온 몸으로 그녀를 지켰다.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애정을 보여준 어머니를 모두 좋아했을 것이다.
공생원은 곧 6·25전쟁의 피해를 봤다. 가장 큰 비극은 식량 지원을 요청하러 광주에 나간 남편이 전쟁 중에 행방불명된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목포에 남아 공생원을 지켰다. 공생원에 있던 고아는 전쟁으로 늘어나 5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치마저고리 모습으로 리어카를 밀고 구걸하며 아이들에게 정성을 다한 모습에 시민들은 감동했다. 장례를 치른 날 신문은 ‘목포가 울었다’고 보도했다고 한다.
윤학자란 이름을 아는 한국인이 많기 때문에 내가 굳이 소개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다우치 지즈코란 이름을 아는 일본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녀를 다룬 한일 공동영화도 있었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이번에 그녀와 관련된 사실을 조사하면서 깜짝 놀랐다. 그런 일본인이 있었다는 점에 자랑스럽기도 하고 내 자신을 돌아볼 때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이번 모임을 생각한 이들은 일본인이 아니다. 파고가 높은 현 한일관계를 걱정하며 어떻게 국경과 역사관의 틈을 뛰어넘을 것인지, 지금이야말로 ‘갯가의 성녀’를 떠올리고 그 인류애를 배울 때가 아닌지 생각한 이들은 한국인들이었다.
10명의 발기인은 김수한 전 국회의장, 공로명 전 외교장관, 나종일 전 주일대사 등 쟁쟁한 분들이다. 영광스럽게도 나도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나를 제외하면 모두 한국인이다. 일본이라고 하면 뭔가 비판과 공격의 타깃이 되는 지금, 그런 일면적인 견해를 뛰어넘자고 하는 자숙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자고 주장하는 ‘용감한 언론’이 눈에 띄는 최근 오히려 일본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은 한때 그녀와 같은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고 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인 나는 지금 그의 남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대 일본인 여성이 목포에서 고아의 구제활동을 돕고 그걸 자신의 천명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런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것은 윤치호 씨의 정열과 큰 박애심을 지켜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스스로 그런 활동에 몸을 던진 한국인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도 ‘갯가의 성인’이라고 부르기에 걸맞지 않은가.
전쟁, 그것도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 속에 고아를 위해 식량을 구하다 목숨을 잃어버린 그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그 마음을 깊이 이해하였기에 윤학자 씨도 이를 악물었다. 한국도 자랑스러워 할 만한 것은 과거 그와 같은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현재 한일은 너무 자신을 사랑한 나머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결여된 것처럼 보인다. 어려움 속에 손을 맞잡으며 위대한 박애정신을 발휘한 ‘갯가의 성부처(聖夫妻)’는 지금 천국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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