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철학자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말입니다. 운명이 아픈 상처만을 건드리는 이유는 그 상처가 그를 돕는 손이기 때문이겠지요? 상처는 그 사람의 특이하고도 고유한 사명을 일깨우는 희생제단일지도 모릅니다.
운보 김기창 선생의 아픈 상처는 듣지 못하게 됐다는 것일 겁니다. 장티푸스에 걸린 어린아이를 위해 외할머니가 달여 준 산삼 때문이었습니다. 열이 많은 아이에게 열을 더했으니 열에 끓게 된 거지요. 모두들 죽는다고 했는데, 죽을 거라 포기한 아이가 살아납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다시 태어난 아이는 듣지 못했습니다. 지옥에서 청력을 바치고 살아온 거지요.
올해가 운보 탄생 100주년입니다.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네요. 기념전의 주제가 ‘예수와 귀먹은 양’입니다. 귀를 희생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운보와, 희생양이 되어 세상을 구원한 예수를 오버랩시킨 주제가 재밌지 않나요?
운보는 6·25전쟁 중에, 죽은 예수의 꿈을 꿉니다. 피바람 몰아치는 전쟁터에서 죽은 예수를 안고 통곡하는 꿈이었습니다. 젊은 몸, 신성한 생명, 아름다웠던 남자의 죽음에 애가 끊어져 목 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잊지 못했던 그 생경한 꿈은 그의 인생의 ‘아리아드네 실’(그리스 신화에서 테세우스가 미로를 빠져나오기 위해 사용한 실)이었겠지요? 비천하게 죽었으나 비천하지 않고, 죽었으나 죽음으로도 세상을 다 밝힌 멋진 남자의 생애를 그리며 자존감을 회복해 갔을 터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 중에 그가 그린 예수의 생애는 서양의 어떤 그림보다도 색이 맑고 담백합니다. 서양미술사에서 모두들 숨이 멎는 것 같다고 표현한 ‘수태고지’는 얀 판에이크의 ‘수태고지’입니다. 워싱턴 국립 미술관의 심장이라 하는 그림입니다. 판에이크의 수태고지를 빛나게 하는 것 중에 눈높이가 있습니다. 천사와 마리아의 눈높이를 맞춤으로서 판에이크는 하늘의 천사와 이 땅의 마리아가 거역할 수 없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수평의 온화한 관계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1950년 운보가 판에이크의 수태고지를 봤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운보의 ‘수태고지’도 천사와 마리아의 눈높이가 맞습니다. 수태를 알리는 천사도 서양의 천사가 아니라 동양의 선녀입니다. 그 선녀의 하강이 부드럽고 호젓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떤가요? 댕기 드리운 마리아는 다소곳이 앉아 방 안에서 물레질을 하고 있다가 수태 소식을 듣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평생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배 속에 두고 물레를 돌리며 실을 자을 수 있는 처녀는 크나큰 운명의 바람에 휘청거리며 비틀릴 처자는 아닌 거지요? 그녀는 운명에 쓸려 자포자기하는 여인이 아니라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내 안의 신성, 소중한 아이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신의 어머니입니다.
운보의 ‘예수의 일생’ 30점은 단순히 한국화했다는 평가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이 생에서 우리가 잉태해야 할 소중한 태양을 느끼고 사랑한 존재의 그림들이니까요. 이 가을, 부암동 서울미술관 나들이 한번 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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