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80)은 8월 경기 수원시 장안구 상광교동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20여 년 머물던 안성시를 떠나 ‘수원 시대’를 연 것이다. 수원시는 그에게 생태체험관 용도로 사들였던 땅과 집을 제공했다. ‘수원 8경’으로 꼽히는 광교산이 포근하게 품고 있는 시인의 집을 찾았다.
대문을 거쳐 포장공사 중인 오르막길을 지나니 병풍처럼 둘러친 산과 널찍한 뜰 사이에 아담한 2층 벽돌집이 나타났다. 밀짚모자를 쓴 시인이 마당에 나와 있다가 반겨준다. 그는 “책 절반은 아직 안성에 있다”고 했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서재는 벌써 만원이다. 책들이 수북이 쌓인 책상 위에는 안경과 두툼한 분량의 교정지가 놓여 있다.
600쪽짜리 시집 창비에서 곧 출간
“틈틈이 쓴 시를 모은 600쪽 시집이 창비출판사에서 곧 나온다. 이것 말고도 새 작품을 절반쯤 완성했다. 제목은 ‘처녀’인데 심청전의 소재만 가져다 내 맘대로 서사(敍事)를 만드는 거다. 1600장 분량으로 천계(天界)하고 지상(地上)하고 수중(水中)을 순환하는 얘기다. 수원으로 이사 온 첫 기념작이 되겠지. 그 다음엔 동서양 사상을 녹여낸 시 ‘운명’이 남아 있고. 그 뒤에도 쓸 것이 또 있다.”
출근하는 직장인처럼 오전 10시면 서재로 들어간다.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작업하고 밤에는 공부와 책읽기를 한다. “인문학의 위기다, 죽었다고 하는데 인문에 관한 이렇게 많은 수확물이 번역된 시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일본보다 활발한 느낌이 들 정도다. 서점에 가면 황홀하다. 온갖 인문의 꽃이 피어 있거든. 지금은 술보다 책이 더 좋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 시가 세상에서 멀어졌다고 말하는데….
“실컷 멀어지기 바란다. 지금보다 더 멀어진 뒤, 다시 시는 사람의 하루하루에 다가올 것이다. 아마도 시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시란 무엇인가, 시인은 누구인가.
“시는 누구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우애를 삶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일반적 우정이 아닌, 하나의 사유 체계로 개념화한 의미로서 말이다. 옛날에 문학은 교사 역할을 했지만 난 그저 누구의 친구, 진실과 비애의 친구가 되고 싶다. 시인은 타인의 가슴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이란 세 살 때부터 남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자(他者)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야 한다.”
노벨상에 대해 묻자 “다른 얘기 합시다”
그는 한국의 시인이면서 세계의 시인이다. 1958년 등단한 뒤 시 소설 평론 동화 등 160여 권을 펴냈다. 시집은 25개 언어로 번역됐다. 나이 들수록 외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올해 상반기에는 이탈리아에 살면서 남아공과 유럽 전역에서 시낭송회를 가졌다. 수원에 짐을 풀자마다 그동안 아껴둔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한 달간 다녀왔다. 내년도 1월 그리스, 5월 스위스, 9월 독일, 10월 미국의 행사 초청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젊은 사람도 장시간 비행은 힘들다. 방랑자 같은 삶이 고달프지 않나.
“아니다. 나는 비행기를 좋아하고 기차를 좋아하고 배를 좋아한다. 어릴 때 늘 배와 기차만 그려서 아버지가 집도 좀 그려 보라고 권했을 정도다. 해외는 피할 수 없는 것만 골라 가는데 내년에도 네다섯 번쯤 가야 할 것 같다.”
2000년대 들어 노벨 문학상 단골 후보에 오르면서 해마다 10월이면 취재진들이 자택으로 몰려와 북새통을 이룬다. 금년 수상자를 발표한 이달 10일도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노벨상’이란 단어를 꺼내자마자 고개를 돌리며 “다른 얘기 합시다”라고 말한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화제를 바꿨다.
―성장을 위해 달려온 한국 사회, 물질적 생활은 나아졌으나 인간의 가치는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 문명은 언젠가 자기 조절을 할 때까지는 지금의 광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인간 또는 인간화는 지난 시대 오랫동안 너무나 벅찬 주제였다가 지금은 물질적 욕망으로 그 주제가 여지없이 해체되고 말았다. 인간은 인간 이외의 만물이라는 위치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치가 권력유지 집착 땐 변화 어려워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문화 융성’이란 국정 목표도 젊은이들에겐 낯선 얘기다.
“나이 든 사람들도 상당수가 비정규직인 사회다. 평일에 산을 찾는 사람이 많은데 아름답지만 슬픈 광경이다. 우리는 엄청난 숙제를 앞두고 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에 문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인인 나로서도 쑥스럽고 당황스럽다. 정부에서 문화란 말을 해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수많은 구호 중 하나가 될까 우려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멘토다. 그런 무책임한 헛소리가 어디 있나. 최고의 문화는 최고의 정치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생존의 품위가 유지된다. 지금처럼 정치가 권력 유지와 영속화에 집착하는 한 변화는 어렵다. 답답해서 어떤 때는 국회에서 시라도 읽을까, 문학적 푸닥거리라도 할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여러 차례 방북했는데 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6·25전쟁 이래 나는 긴 역사를 좋아한다. 철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천년의 시간을, 인도의 한 철학자는 2500년의 단위를 얘기한다. 참 마음에 든다. 우리는 한 정권이 끝나면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는데 역사를 보는 시야가 너무 짧다. 통일이란 것도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100년의 긴 사업, 비즈니스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도 분단 100년 이내에 통일될 거다. 그 길을 가고 있는 거다. 남과 북이 적과의 동침을 하는 것 같다. 이쪽이 있어 저쪽이 강해진다. 또 다른 의미의 정치적 우정이랄까.”
그는 덧붙였다. “저쪽의 남침이란 것은 역사에 있어 커다란 실수였다. 우리 국회도 북한 없이 정치했으면 좋겠다. 북을 갖다 붙여 정치하는 게 너무 악습 같다.”
난 회의론자, 스스로에 대해서도 회의
―남도 북도 나쁘다는 말인가.
“나는 양비론자가 아니다. 옛날에 북한 갔을 때 개성 만월대에서 남쪽 마을에 걸린 대형 태극기를 발견했다. 태극기가 금기인 땅에서 태극기를 만난 것이다. 저 깃발 밑에서 내가 자라고 컸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채동욱 사태와 한국사 교과서 등 온갖 문제를 진영 논리에 따라 접근하는 시대다. 대립을 좁힐 방법은 없는지.
“우리들은 사랑할 줄 모른다. 만날 줄 모른다. 진영 논리의 이기주의 앞에서 우리는 고전적인 덕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대 인도의 중도, 고대 중국의 중용 또는 서구의 황금의 중도 같은 가치들이 현대인에게 삶의 실천으로 육화되어 본 적이 없다. 나는 한국의 현 상황을 이런 가치로 말하는 단순성을 경계하면서도 한국 정치와 사회에서 중도가 구현되는 사례를 최고 형태로 보고 싶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상대적 최고 형태를 단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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