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는 일본이 중국에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을 “내가 설계했다”고 자랑하고 다닌 인물이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 내각에서는 군수차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패전 후에는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3년간 도쿄 스가모(巢鴨) 형무소에 수감됐다. 운 좋게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난 그는 이후 승승장구해 1955년 출범한 자민당의 초대 간사장과 외상을 지냈다. 1957년 제56대 총리에 등극한 그는 1960년 안보 파동으로 물러날 때까지 자주헌법 제정을 주장하고 일본의 핵 보유가 위헌이 아니라고 국회에서 당당히 답변하는 등 일본의 ‘정상 국가화’를 향해 거칠 것 없는 행보를 보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쇼와(히로히토·裕仁 일왕 시대의 연호·1926∼1989)의 요괴’라고 불렀다.
‘강한 일본’을 되찾겠다는 아베 총리는 외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일본 재건을 위해 신념을 관철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는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의 아들이지만 기시 노부스케의 DNA(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몸속엔 또 하나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그가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친할아버지 아베 간(安倍寬·1894∼1946) 얘기다. 일본을 전쟁으로 이끈 도조 내각과 첨예하게 맞섰던 그는 기시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정치인이다.
도쿄제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간은 1937년 총선에서 군부 앞에 무력한 기성 정당을 통렬히 비판하며 고향인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무소속으로 처음 중의원 의원에 당선했다. 도조 내각이 전쟁에 비협조적인 후보를 낙선시키려 추천 제도를 도입했던 1942년 총선에서도 그는 비(非)추천 후보로 입후보해 당선했다. 경찰이 24시간 그를 미행하고 선거를 방해했지만 평화주의자로서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선 후에는 도조 내각 퇴진과 전쟁 종결 운동을 벌였다. 훗날 자민당 내 대표적인 비둘기파로 1974년 총리에 올랐던 미키 다케오(三木武夫·1907∼1988)도 당시 간과 함께 도조 내각 퇴진 운동을 벌였던 동지였다. 간은 일본 패전 이듬해인 1946년 결핵으로 52세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야마구치 현 출신이면서도 전쟁과 평화라는 정반대 이미지의 상징이던 기시와 간은 한때 의기투합했다. 기시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도조 당시 총리에 반발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일본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자 기시는 도조를 배신했다. 전후 살아남기 위한 계산에서였다. 간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지만 당시 짧은 인연으로 간의 외아들 신타로와 기시의 장녀 요코(洋子)는 훗날(1951년) 결혼에 이르게 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이 아베 총리다.
아베 총리는 ‘싸우는 정치가’를 정치 신념으로 삼고 있다. 1960년 야당과 좌파 세력의 반대 속에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관철시킨 외할아버지가 역할모델이다. 하지만 진짜 싸우는 정치가는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군부 독재에 맞섰던 친할아버지였다는 게 일본 정치학자들의 평가다.
아베 총리는 일찍 세상을 떠난 친할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가 외할아버지가 아니라 친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자랐다면 정치인으로서 그의 길은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베 간이라면 지금 일본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까. 동북아의 긴장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요즘, 아베 총리의 몸속에 흐르는 또 하나의 DNA에 주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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