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4>옛 이야기 구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8일 03시 00분


옛 이야기 구절
―정지용(1902∼1950)

집 떠나가 배운 노래를
집 찾아오는 밤
논둑길에서 불렀노라.

나가서도 고달프고
돌아와서도 고달펐노라.
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펐노라.

나가서 얻어 온 이야기를
닭이 울도록,
아버지께 이르노니-

기름불은 깜박이며 듣고,
어머니는 눈에 눈물을 고이신 대로 듣고
니치대든 어린 누이 안긴 대로 잠들며 듣고
웃방 문설주에는 그 사람이 서서 듣고,

큰 독 안에 실린 슬픈 물같이
속살대는 이 시고을 밤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처럼 돌아서서 듣고,

-그러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
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어니

이 집 문고리나, 지붕이나,
늙으신 아버지의 착하디착한 수염이나,
활처럼 휘어다 붙인 밤 하늘이나.

이것이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하는 이야기 구절일러라.


그 옛날 식민지 시절, 집 떠나 오래 소식 없던 사람이 돌아온 날 밤의 그 집 풍경이다. 집에 돌아온 화자는 제일 먼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을 테다. 식구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모여 화자가 ‘나가서 얻어 온 이야기를/닭이 울도록’ 듣는다. 북간도나 전쟁터에서 그가 겪은 이야기를. 시인은 화자의 찌들고 고달픈 삶을 ‘나가서도 고달프고/돌아와서도 고달펐노라./열네 살부터 나가서 고달펐노라.’ 이 세 마디로 탁 건들고 시원스럽게 넘어간다. 애수가 있는데 구질구질하지 않다. 화자는 자기가 들려주는 게 ‘어떤 시원찮은 사람들이/끝맺지 못하고 그대로 간 이야기’란다. 일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로부터 전하는 그런 이야기란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되기 이전의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시다. 예스러운 표현들이 여간 웅숭깊고 맛깔스럽지 않다. ‘그 사람이 서서 듣고’도 얼마나 은근한가. 와이프라든지 마누라와는 격이 다르다. 애수에 찬 이야기를 소박하고 따뜻하고 호방하고, 그리고 아름답게 그렸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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