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자들은 일본의 ‘지도리가후치(千鳥ヶ淵) 전몰자 묘원(墓苑)’을 아는지 모르겠다. 해외에서 사망한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전사’와 민간인 유골을 봉납한 국가시설이다. 그 주위는 벚꽃 명소여서 매년 봄 많은 사람이 ‘꽃구경’을 한다.
불과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야스쿠니(靖國)신사는 내전인 보신(戊辰·무진) 전쟁과 세이난(西南) 전쟁의 정부군 전사자, 청일·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대외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 군속을 합사한 신사로 묘원은 아니다. 즉, 유골이 매장돼 있지 않다.
야스쿠니신사가 1978년 전사자도 아닌 A급 전범 14명을 합사해 스스로 존재를 정치화했지만 지도리가후치 묘원은 특정 종교를 위한 시설이 아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유골을 보관하는 시설로 종파성이 없기 때문에 현재 불교, 신도(神道·일본 전통종교), 기독교 등 각종 단체가 추도 행사를 여는 ‘묘원’이 됐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전 관방장관이 전몰자 추도 및 평화기원 시설 건립을 검토한 적이 있다. 지도리가후치 묘원을 ‘국립 무종교의 항구적 시설’로 만들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10월 3일 오전 ‘지도리가후치 묘원’에 키 큰 두 명의 미국인이 방문해 일본 정부 관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헌화하고 묵념했다. 존 케리 국무장관과 척 헤이글 국방장관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다음 가는 미 정부 요인 2명이 참석했으니 지도리가후치 묘원 측에서 보자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미 정부가 별 말을 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도 큰일이 아닌 것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의 추계대제를 앞두고 그 사건이 우연히 일어났을 리가 없다. 또 미 정부 대일 관계자가 야스쿠니신사와 지도리가후치 묘원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얼마 뒤 니혼게이자이신문(10월 20일)은 워싱턴발(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총리 재임 중 야스쿠니 참배를 자숙하길 바란다는 사인이다” “야스쿠니 참배를 대신하는 추도의 형태를 일본 측에 보여 줬다”는 미국인 전문가의 분석을 전했다. 미 정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내정 간섭을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외 잡지 인터뷰와 기자회견 등에서 지금까지 아베 총리는 알링턴 묘지를 예로 들며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정당화해 왔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케리 국무장관과 헤이글 국방장관은 헌화와 묵념을 통해 지도리가후치 묘원이야말로 알링턴 묘지에 상당하는 것임을 보여 줬다. 정면에서 논쟁하지 않고 행동으로 규범을 시사한 것은 성숙한 정치적 접근법이다.
최근 한국 정부는 이전보다 더 각료와 국회의원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확실히 100명 이상 국회의원이 집단으로 참배하는 모습은 이상하다. 정면에서 논쟁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난 것 같다.
하지만 두 장관의 행동을 참고해 이후 오바마 대통령을 시작으로 외국 요인들이 지도리가후치 묘원에 헌화하고 묵념을 계속하면 어떻게 될까. 그게 관례화된다면 지도리가후치 묘원은 알링턴 묘지로 될 것이다.
현재 역사인식을 둘러싼 명분 논쟁으로 한일은 정면에서 충돌해 정상회담도 열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는 ‘역사 화해’가 더욱 멀어질 것이다.
논쟁을 계속하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응하고 정정당당히 지도리가후치 묘원을 방문한다면 어떨까. 묘원을 방문하는 최초의 국가 원수로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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