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혈맹이라도 타국 정상의 통화를 엿들을 권리는 없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30일 03시 00분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외국 정상의 전화를 도청했다는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전직 정보기관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유출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 35개국 정상의 통화를 엿들었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휴대전화는 10년 넘게 도청했다. 세계 각국이 우방과 적대국을 불문하고 서로 치열한 첩보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지만 불법적 행위가 명백히 드러난 만큼 미국은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미국 의회와 정치권의 대응은 실망스럽다. 정치권 전체가 한목소리로 “통상적인 대(對)테러 첩보를 위한 불가피한 활동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우방들은 자국의 국가 안보를 위해 미국의 정보력에 의존해 오지 않았느냐”며 피해국들의 사과 요구를 일축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도청 사실을 몰랐으니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외국 정보기관이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도청했어도 똑같이 반응했을지 묻고 싶다.

현재까지 한국 대통령이 도청 당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우리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답은 ‘입장을 이해한다’는 수준이라고 한다. 주미 한국대사관이 도청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도 미국 정부는 “통상적 절차였을 뿐 불법은 아니다”라는 책임 회피성 답변을 했다.

지금까지 전례를 보면 미국이 우리 대통령에 대한 도청 행위를 인정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불법행위를 인정할 경우 국가 책임이 따르고 대규모 송사에 휘말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 측이 “우리도 정보 수집과 사용에 추가적인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언급한 선에서 문제를 덮으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을 도청했다면 미국이 인정하든 안 하든 분명하게 따져야 한다. 관련 책임자의 문책을 요구하고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도 받아내야 한다. 아무리 동맹관계라 하더라도 우리 주권을 침해하는 명백한 불법행위까지 눈감아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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