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의사면허를 취득한 의사는 총 3059명. 이 중 여자 의사는 1013명으로 약 3분의 1(32%)을 차지한다. 올해만 반짝 나온 현상이 아니다. 여의사의 약진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 것은 2000년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다. 2007년 전문의 시험(의사자격 취득 후 3∼4년간의 수련 과정을 거쳐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는 시험)에서는 26개 전문과목 중 가정의학과 산부인과 직업환경의학과 성형외과 소아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등 총 9개 과에서 여의사가 수석을 차지했다.
○ 알파걸 중 알파걸 여의사
의대 95학번인 이연은 쉬즈웰 산부인과 원장(37)은 “어머니의 권유가 직업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원래는 유전공학 전공 교수를 하고 싶었는데 의사야말로 전문직으로서 남녀차별도 없고, 재정적으로도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어머니가 강력하게 권했다”고 회고했다.
이 원장이 1995년 입학 당시 의대 1학년 총정원은 140명. 이 중 여자는 2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3년 뒤인 1998년 이후로 정원의 절반 가까이가 여자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의사들은 알파걸 중의 알파걸. 대개 과학고나 일반고에서 전교 수석을 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교 시절 그러했듯 의대에 진학해서도 남자들과 똑같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렇다 보니 여의사들의 의식 밑바닥에는 ‘절대 남자에게 져서는 안 된다’ ‘여자라서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한다’는 무의식이 크게 자리 잡는다고 한다. 30대 비뇨기과 여자 전문의 A 씨는 이런 에피소드를 전했다.
“성기능에 문제가 있는 남자 환자의 경우 밤새도록 계속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밤에도 몇 번 발기가 되는지 횟수와 상황을 체크하는 야간 발기 검사를 해야 한다. 전공의가 혼자 남아 당직을 서야 하는 데다 성기에 측정 장치를 장착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 남자 의사도 이런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나 역시 싫었지만 교수님이 ‘못할 것 같으면 남자 동료를 대신 당직 세워줄까’라고 하셨는데 여자라서 못한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거절했다.”
○ 알파걸들의 비애
기자가 만난 여의사 중 대부분은 “의료계에서 여의사는 더이상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자리가 잡혔다”고 말했다. 오히려 대학이나 인턴 과정에서 여자들의 성적은 상위권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럴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았다.
여자 전문의 B 씨(33)는 “의대 6년, 인턴 1년, 수련의 4년 도합 11년을 남자와 경쟁한 여의사들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고 설명했다. 11년간 열심히 공부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해서 대학병원에 전임의(펠로)로 들어간다고 해도 가시밭길이 이들을 기다린다.
우선 교수 한두 명 뽑는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결정의 맨 윗선에 있는 남자 원로, 중진들의 생각이다. 서울 시내 대학병원에서 4년 넘게 펠로 생활을 한 여의사 C 씨는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을 여러 편 썼지만 최근 지원한 대학병원에서 “채용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다. 납득할 수 없었던 C 씨가 지인을 통해 사정을 알아보다 한 간부로부터 “이전에 우리 병원에서 과장을 하던 여자가 집안 사정을 핑계로 갑자기 일을 그만두더라. 여자들은 책임감이 부족하다. 같은 여자니 똑같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C 씨는 “결과적으로 실력 부족 탓이 크겠지만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채용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 대학병원 간부는 “여의사들이 열정도 있고 의지도 강하지만 실제로 일을 시켜 보면 리더십 면에서 남자보다 부족하다는 게 내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의사가 많이 배출될수록 오히려 여자들끼리의 경쟁만 치열해진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 할당 정원’이 있다는 설명이다. 여자 전문의 D 씨는 “교수님이 제자들 중 여자 4명이 펠로 과정에 지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지원도 안 한 남자 제자들에게 ‘내 밑으로 들어와라. 키워줄게’ 하며 접촉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자들 수가 늘면 뭐하나, 똑똑한 여자들은 이제 여자들끼리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한 대학병원 남자 교수도 “여자가 많으면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 일 시키기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보니 인위적으로 남자 후배들을 키워주려는 분위기가 있다. 성적으로야 1∼5등까지 여자가 차지한다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의사 중에는 “전문 지식을 쌓는 것에는 별 어려움을 못 느끼는데 사람을 관리하거나 조직을 대할 때는 서툴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대형병원 가정의학과 여의사인 D 교수는 “남자들의 네트워킹을 당해낼 수가 없다. 동기, 학년, 고향을 정말 잘도 외운다. 누가 누구 위인지 아래인지, 고등학교가 같은 것까지 어떻게 알아서 자기들끼리 어울린다”고 말했다.
○ 역시 문제는 육아
막상 대형병원에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중도에서 그만두는 포기자들이 생긴다. 진료만 잘한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연구, 회의 준비, 병원 잡일 등을 해내야 한다. 회식문화에 잘 끼지 못하는 여자들 특유의 ‘친화력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육아와의 병행. 신동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여)는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여의사들의 가장 큰 적은 역시 혼자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육아다. 처음에는 야심차게 시작했던 여자 후배들이 도중에 힘들다며 목적 의식을 잃고 꿈을 접는다”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여의사들의 스트레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 박경아 연세대 해부학교실 교수는 “2000년 초 캐나다에서 의사들의 정신건강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적이 있는데 일반인 남녀와 의사 남녀의 자살률에서 여의사 자살률이 일반인보다 4.7배나 높았다”고 전했다.
연세대 의대에서는 2004년부터 여의사들에게 스트레스 관리를 가르쳐주는 ‘여성의학(women and medicine)’을 도입할 정도다. 당직 콜이 왔을 때나 병원 업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좀 덜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적은 시간을 쪼개 아이들 양육에 활용하는 방법도 배운다.
○ 야망을 낮춘 여자들
아예 의사 직을 때려치우고 시집가서 애만 키우는 의사들도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가사에 몰두하고 있는 한 30대 전업주부는 “오랜 경쟁과 많은 시험을 거치면서 문득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평생 아등바등 살았는데 행복하지 않다. 나는 해봤지만 굳이 자식한테까지 시키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그에게 ‘남자들과 경쟁하는 삶을 맛보면서 질려 버린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는 답이 왔다.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은 아니더라도 결혼 임신 출산을 계기로 야망을 스스로 줄인 여의사도 많다. 이들은 “전공 분야를 선택할 때 내 적성보다 결혼생활과 양립이 가능한지를 먼저 물었다. 하고 싶은 일이나 높은 이상을 위해 달려가기보다 가정불화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육아도 가능한 영역에서 일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여의사들의 전공은 한쪽으로 쏠리는 편중 양상을 보인다.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인 면허등록 현황’을 살펴보면 2012년 현재 여의사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분야는 △내과(2950명) △소아청소년과(2607명) △산부인과(2078명) △가정의학과(1933명) △마취통증의학과(1143명) △정신건강의학과(750명) 순이었다.
남자 의사에 비해 여의사 비율이 압도적으로 낮은 분야는 △외과(남 6092명 대 여 401명) △정형외과(5508명 대 33명) △신경외과(2464명 대 29명) △흉부외과(1101명 대 47명) △성형외과(1747명 대 104명)다.
이에 비해 △진단검사의학과(남 418명 대 여 452명) △병리과(424명 대 475명)는 여의사가 더 많았다. 영상의학과(1812명 대 1183명)와 정신건강의학과(2157명 대 750명) 역시 여의사 증가율이 최근 몇 년간 급속하게 높아진 분야다.
내과 전문의 E 씨는 “호출이 잦고 응급상황이 많은 전공에는 여자들도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