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5>나의 시(詩)―약한 너에게 기대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30일 03시 00분


나의 시(詩)―약한 너에게 기대어
―김정란(1953∼)

그가 왔다. 살금살금, 자신없어하며, 나의 눈치를 보며. 얘, 하고 그가 불렀다, 얘, 나 좀 볼래? 내가 말했다. 넌 누구니, 주눅 들어 있는, 영양실조의 너는?

그애는 정말로 고개를 떨구고, 쩔쩔매면서, 손을 쥐어뜯으며, 땀을 뻘뻘 흘리며, 금방 눈물이 터질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런데 말이지”

“하기는 말이지”

나는 너의 자신 없음을 지킨다, 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의 짝궁이여.

늘상 어쩌면 이렇게 해거름의 시간에 우리는 외로이 한 의자에 앉는 것일까. 쓸쓸하게, 그 쓸쓸함으로 서로를 알밖에 없는 것처럼.

“얘 하지만 얘”


우리는 가만히 서로에게 기댄다. 세상은 빛으로 빛나는 것을, 눈뜨는 법만 배우면, 우리의 시간은 신나게 번쩍이는 강인 것을,
나는 그애를 토닥거려준다, 자, 배워야지, 안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다행히도 살아 있는 동안 말이야.

화자는 사회적 약자는 아닌 듯하다. 학생이라 치면, 성적도 용모도 품행도 생활형편도 뒤떨어지지 않을 테다. 그런데 말도 소심하게 하고 ‘손을 쥐어뜯으며, 땀을 뻘뻘 흘’린다. 쌀쌀맞고 새치름한 강자로, 멀쩡해 보이지만 실은 겁이 많고 심약한 거다. 누구라도 그렇듯이 화자도 강한 자기와 약한 자기를 다 갖고 있다. 평소에는 강한 자기로 지내는데 해거름 시간 같은 때면 자기 안의 약한 애가 보인다. 쓸쓸하니까 보인다. 즐거울 때는 안 보인다. 화자는 자기 안의 약함을 ‘짝꿍’으로 지키고자 한다. 그 약함이 바로 시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버는 게 활력소가 될 테지만 시인에게는 ‘눈뜨는 법을 배우는’ 게 활력소일 테다. 자기애(自己愛)를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여주는 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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