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들을 보자 “해쓱해졌다”며 안쓰러워한다. 이런 걱정이 아들에겐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이다. 하지만 곁의 며느리는 ‘내 아들에겐 내가 해준 밥이 최고’라는 메시지로 해석한다.
여자의 인생은 ‘돌봐주기’의 연장선에 있다. 어릴 때는 인형을 돌봐주고 자라면서는 친구들을 보살피다가 급기야 다 큰 남자를 품에 안는다. 돌봐주기의 정점은 자신의 아이다. 여성, 특히 어머니에게 있어 아들은 혼신의 작품이자 영원히 돌보고픈 대상이다. 한데 그런 아들을 낯선 젊은 여자에게 하루아침에 빼앗긴다. 젊은 여자는 그에게서 어머니의 흔적을 지워내느라 골몰한다. 옷차림이며 식성, 스타일 등 전부를 자기 취향으로 바꿔놓는다.
어머니는 며느리와 점심을 준비하며 아들의 차림새에 대해 기어이 한마디 한다. “옷은 저게 뭐냐. 결혼 전에는 잘 입고 다녔는데….” 이 또한 며느리에게는 ‘왜 바꿔 놓았느냐’는 추궁으로 들린다. 며느리는 쾌활하게 답한다. ‘해쓱해졌다’는 오해는 “운동해서 살이 빠졌다”고 풀어드린다. 옷차림도 마찬가지다. “저 옷, 예전에 어머님이 사주신 거라고 쉬는 날이면 저것만 입던데요?”
어머니는 아들을 바꿔놓고도 안 그런 척하는, 게다가 한마디도 지지 않는 며느리가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초창기의 결혼생활이란 예전부터 돌봐왔던 어머니란 여성과, 이제 돌보게 된 아내라는 여성 사이의, 때로는 은밀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보살핌 권한 투쟁이다. 회사 일로 치면 여전히 권한을 누리고픈 전임자와 자기 업무를 장악하려는 신임의 신경전과도 비슷하다.
어머니와 며느리는 식사를 준비하고 과일을 깎으며 마치 ‘어디 가면 뭐가 싸더라’는 투의 대화로 공격과 방어를 넘나든다. 일상 대화에 뼈를 심어 공격하는 게 여자들의 방식이다. 여자들은 웃으면서 다정하게 싸운다. 남자들에게는 어머니와 며느리가 평화롭게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들에겐, 부모님 댁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표정이 사라지는 아내의 얼굴이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황당하기는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가 방금 전까지 며느리와 즐겁게 지내고서는 왜 갑자기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내의 얘기를 아무리 들어봐도 며느리가 뭘 잘못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내는 여우같은 며느리에 대한 불만을 한도 없이 늘어놓는다.
남자는 어머니와 아내, 나이가 든 후로는 아내와 며느리, 때로는 장모라는 여자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살아야 하는 존재다.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 묘한 격돌의 사이를 절묘하게 헤치고 나가며 눈치 빠른 족속으로 진화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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